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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권력기관-경찰치열한 보직 경쟁

입력 | 2003-09-30 18:06:00

같은 제복에 같은 총경 계급장을 달고 있는 경찰서장들이지만 이들이 맡고 있는 경찰서장 보직에는 엄연한 차등이 있다. 1998년 4월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 경찰서장회의에서 서장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0여년 전 경기 A군의 경찰서장이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돌연 교체되는 ‘사건’이 있었다. 개인 비리 등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한 통상 서장으로 재직하는 기간이 1년인 점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다.

당시 경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인사에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돌았다. 한 전직 경찰 고위 간부는 “A군 서장의 갑작스러운 교체는 당시의 정치권 권력교체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신실세측이 전임 서장을 구실세와 가깝다는 이유로 도중하차시키고 자신들과 가까운 인물을 기용했다는 얘기다”고 회상했다.

A군 경찰서장 자리가 이처럼 정치권의 ‘백’과 직결될 만큼 경합이 치열했던 것은 관내의 골프장 때문이다. 매주 쇄도하는 정치인 등의 골프 부킹 부탁을 들어주며 A군 서장은 자연스럽게 권력실세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 서장에게 ‘신세’를 진 실력자들은 훗날 서장의 경무관 진급에 든든한 ‘원군’이 돼 주곤 했던 것이다.

A군 경찰서장을 둘러싼 이 일화는 서장이라고 다 같은 서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경찰은 공식적으로 전국의 경찰서 262개를 관할 인구, 범죄 발생률, 치안여건, 치안수요 등을 고려해 5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서울의 31개 경찰서는 최상급인 특별군이며 나머지 231개 경찰서는 각각 1∼4군으로 나뉜다. 각 군에 속하는 경찰서의 서장에 부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갖춰야 한다. 특별군의 경우 총경에 진급한 지 4년 이상이 돼야 하며 1군은 2년 이상 돼야 서장 보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같은 공식 분류보다는 암묵적인 서열이다. 같은 군에 속한 경찰서라도 상대적으로 공(功)을 많이 쌓을 수 있는 곳, 윗사람에게 ‘눈도장’을 쉽게 찍을 수 있는 경찰서장 자리가 핵심 요직으로 꼽힌다.

경찰의 ‘꽃’으로 불리는 총경들간에 경찰서장 보직을 둘러싸고 물밑 신경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도 바로 이 같은 보이지 않는 ‘차이’ 때문이다.

매년 50∼80여명이 배출되는 총경들은 승진하거나 정년퇴직할 때까지 대략 3, 4 군데 경찰서의 서장을 지낸다. 1군 경찰서의 서장은 누구나 한 번씩은 한다. 그러나 특별군인 서울의 경찰서장만은 예외다. 서울지역의 경찰서장은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서울에서 경찰 근무를 시작한 ‘서울자원’ 출신으로서 1군 경찰서장을 마친 사람에게만 자격이 부여되고, 그중에서도 잘나가는 일부 인사만이 실제로 서장으로 기용된다.

서울에서도 종로 강남 서초경찰서장은 요직 중의 요직이다. 우선 관내에 청와대가 있는 종로경찰서는 경비와 대통령 의전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청와대와의 교류가 많다 보니 윗사람의 눈에 띌 확률이 높기 때문에 지망 1순위로 꼽힌다.

강남경찰서와 서초경찰서는 관내에 고위 공무원과 부유층이 많은 데다 유흥가가 발달해 고위층의 민원과 대형 강력사건 등이 끊이지 않아 진급을 위한 공적을 쌓는 데 최적임지로 꼽힌다.

성격은 다르지만, 경찰 공식 순위 1번인 서울 중부경찰서장도 최상위급에 해당한다. 중부경찰서장은 1년에 1, 2차례 열리는 전국 경찰서장 회의에서 전국 서장을 대표해 의전행사를 지휘하는 프리미엄을 누리기도 한다.

최상위급 경찰서장을 지냈다고 반드시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승진의 기회’가 많은 만큼 ‘추락의 위험’ 또한 높다. 최기문(崔圻文) 현 경찰청장이 대표적인 사례. 최 청장은 1993년 종로경찰서장으로 부임해 경무관 승진을 눈앞에 뒀으나 관내에 있는 조계사에서 폭력 분쟁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중도하차하는 낭패를 봐야 했다.

올해 5월에는 서울 강남경찰서장이 지휘 미숙 등의 이유로 교체됐는데 강남경찰서는 이전에도 대형 사건의 여파에 휘말려 서장이 전격 경질되는 경우가 잦았던 곳이다.

한편 시대 변화에 따라 최상위급에서 한 단계 떨어진 경찰서도 있는데, 서울 관악경찰서가 대표적이다.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대를 관내에 두고 있는 관악경찰서 서장은 공적을 쌓는 데 유리하다는 이유로 총경들이 지망 첫 순위로 꼽는 경찰서 중 하나였다.

이현두기자 ruch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