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김상균·金庠均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대북 송금 의혹 사건’ 결심(結審)공판에서 이 사건으로 기소된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징역 5년이 구형되는 등 관련자 7명에게 징역 5∼1년이 구형됐다.
이날 재판 과정에서 송두환(宋斗煥) 특별검사는 “설령 통치행위라도 위법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며 피고인들의 처벌을 요구한 반면 박 전 장관 등은 실정법 위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남북평화 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선고공판은 9월 5일 오전 10시.
▽특검팀의 구형=송 특검은 박 전 장관 외에 이기호(李起浩)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근영(李瑾榮) 전 산업은행 총재, 박상배(朴相培) 전 산은 부총재에 대해 각각 징역 3년, 임동원(林東源)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징역 2년, 김윤규(金潤圭) 현대아산 사장과 최규백(崔奎伯) 전 국정원 기조실장에 대해 각각 징역 1년6월과 징역1년을 구형했다.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이기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왼쪽부터)이 18일 대북 송금 의혹사건 4차 공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지법 재판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전영한기자
송 특검은 논고를 통해 “특검 수사는 남북정상회담 자체를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남북정상회담의 추진 과정에서 위법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를 수사한 것”이라며 “설령 대북정책을 통치행위로 본다 하더라도 불법 대출 및 불법 송금 행위까지 모두 통치행위라고는 할 수 없고, 위법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국민적 합의와 토론을 거쳤다면 국민이 두 패로 갈라져 상호 적대, 비방하고 마침내 특검수사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불행한 사태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피고인들이 통치행위론이나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아전인수식으로 원용, 면죄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박 전 장관 등 피고인들은 실정법 위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남북평화와 통일의 당위성 그리고 국가경제를 생각해 내린 정책적 판단이었음을 강조했다.
박 전 장관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최후진술을 통해 “북한은 법적으로는 엄연한 이적 집단이지만 같은 민족으로, 언제까지 적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며 “남북문제는 남과 북 각각의 눈높이가 아닌 민족의 눈높이로 봐야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최후진술 내용을 A4용지 3장에 써와 눈길을 끌었다.
임 전 원장도 “햇볕정책의 추진으로 냉전의 장벽을 뚫고 남북 경제 협력을 이룰 수 있었다”며 “시작이 반이며 최근의 북핵 문제만 원만히 해결된다면 통일도 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지원금 1억달러 은폐 기도=이날 공판과정에서 특검팀 수사기록을 통해 박 전 장관, 임 전 원장, 이 전 수석, 김보현(金保鉉) 전 국정원 3차장 등 대북 송금 사건의 주역들은 북측과 약속한 정부 부담금 1억달러 합의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검팀 등에 따르면 박 전 장관 등 4명은 4월 17일 특검 수사가 시작된 이후 4월과 5월 4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1억달러 부분을 특검 수사에서 언급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이들의 은폐 시도는 현대측의 북한 송금 액수 및 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1억달러의 존재를 포착한 특검팀이 정 회장을 추궁해 정부 대신 1억달러를 송금했다는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판사도… 검사도… 피고인도… “鄭회장 애도”▼
▽고 정몽헌 회장에 대한 애도=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처음 열린 이날 공판은 재판부와 특검팀, 그리고 피고인들이 모두 정 회장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재판장인 김상균 부장판사는 재판에 앞서 “이번 재판을 진행하던 도중 정 회장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돼 재판부로서도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송 특검도 “얼마 전 타계하신 정 회장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하는 마음을 표하고자 합니다”라는 말로 논고를 시작했다.
특히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최후진술에서 “생전의 정 회장께서 ‘이제 잘 될 일만 남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욕심이 지나쳐 회장님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닌지…”라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박 전 장관도 “남북교류 평화협력 시대를 열었던 정 회장이 타계해 한없는 슬픔을 느낀다”며 “고인의 유지대로 평화협력에 이어 남북 통일시대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