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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나는 시]이정록 '산 하나를 방석삼아'

입력 | 2003-08-08 18:24:00


산 하나를 방석삼아

이 정 록

단풍나무 아래에

돼지머리가 버려져 있다

돼지는 일생을

서 있거나 누워 지낸다

앉아 있을 경우는, 오직

새끼를 낳은 암놈이

앞발만 세우고 비척거릴 때다

돼지머리는

제대로 한번 앉아보려고

목덜미 아래를 버린 것 같다

선지피는

단풍잎이 다 들이마셨나

도끼가 지나간 자리로

산 하나를 꿰차고 있다

잘린 목으로

일찍 떨어진 낙엽을

어루만지고 있다

- 시집 ‘대해 속의 고깔모자’(고요아침) 중에서

기우제라도 지낸 걸까? 누구의 사업번창과, 무병장수를 기원해 주던 걸까? 주둥이에 물렸던 지폐는 도로 챙겼는지 보이지 않지만 맨입에 동전 서넛 문 돼지머리가 ‘산 하나를 방석삼아’ 앉아 호기롭게 앉아 있다. 쉰 막걸리 따라 올리며 빌던 인간들의 서푼짜리 소원쯤이야 너끈히 들어주고도 남겠다.

참형(斬刑)도 왜 돼지머리에 이르면 한결같이 익살스러운가? 억지 조문 간 것처럼 살점 꼬집으며 비통한 표정을 지어도, 말갛게 면도한 돼지머리 실물 영정을 보면 왜 주둥이 놓친 풍선처럼 바람이 새곤 하는가?

빙그레 올라간 입꼬리에 문득 경건해지기도 하는 건 저 웃음이 돼지의 삶을 관통하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저토록 삶을 압축시킨 선승이 있을까? 먹고, 자고, 웃고. 일생 진자리 마른자리,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깊은 똥둣간의 선정 끝에 홀연히 깨달아 외친 일갈이 ‘꿀꿀-(세상만사 꿀맛)’

평생 달지 않은 밥 없고, 달지 않은 잠 없으니 생로병사마저 발목에 걸리지 않는다. 도끼가 목을 지나가도 미소 잃지 않고, 죽어 인간이 꾸민 발복의 제단에 맨목으로 안기를 마다 않더니 이제 그 잘린 목으로 낙엽의 상처마저 어루만진다. 저래서 돼지의 일본말이 붓다(豚ぶた/Buddha)인가?

돼지머리는 제대로 한번 먹어보려고 목덜미 아래를 버렸다. 산 하나를 꿀꺽 삼켰다. 몸을 버려서 더 큰 몸을 얻었다. 이제 저 산은 돼지 입을 빌려 웃으리라. 단풍 더욱 붉고, 눈보라치리라. 명년 봄, 열반 적정의 세계로 돌아간 썩은 돼지머리 위로 제비꽃 여인숙 하나 세 들리라.

반칠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