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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포럼]이강숙/칸타타 같은 지도자 원한다

입력 | 2003-05-04 18:23:00


사람마다 신문에 글을 쓰는 이유가 다른 것 같다. 신문에는 시사성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는 시사성 있는 글의 홍수에 밀려 떠내려갈 것 같은 나는 오히려 홍수의 범람을 막고 싶다.

자기 전문 분야에서 유용한 정보를 주는 글을 쓰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전공 분야에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 아는 체하기 싫어서라기보다 전문 분야에서도 생각하면 할수록 대답이 어렵기 때문이다. 옳은 대답 하나를 얻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예를 들면 이렇다.

▼세월 흘러도 감동주는 음악처럼 ▼

‘교가나 응원가 같은 노래는 사용용인가, 감상용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옳은 대답은 얻기 힘들다. 질문은 간단한 것 같으나 정답을 얻지 못해 나의 가슴은 답답하다. 교가는 학교의 행사에서 사용하는 노래이고 응원가는 운동 시합에서 사용하는 노래이다. 그러니까 사용용인 것은 분명하다. 애국가 같은 노래도 사용용이지 감상용은 아니다.

서양음악 양식사를 보면, 처음에는 사용용이던 음악이 세월이 흐른 후에는 감상용으로 바뀌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작품의 구조가 워낙 출중한 음악이어서 시간이 흐른 후 사용 가치는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감상 가치가 날로 급등하는 음악이 있다. 바흐의 칸타타도 그러한 음악 중 하나다. 처음에는 예배를 위한 사용용 음악이던 것이 뒤에 가서는 감상용 음악이 되었던 것이다. 춤곡 역시 처음 생겼을 때에는 춤을 위해 ‘사용된 음악’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쇼팽의 왈츠 같은 음악은 귀한 감상용이 되었다.

음악만이 그러한가. 우리의 삶을 묶고 있는 것 중 하나인 시간의 경우는 어떤가. 시간 역시 사용용일 때가 있고 감상용일 때가 있다. 나에게 작업 시간은 사용용이고 여가 시간은 감상용이다. 사용되어지는 시간과 감상되어지는 시간의 의미는 다르다. 강물 흐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은 감상용이 된다. 이럴 때 시간의 흐름을 무목적적으로 즐길 수 있다. 흐름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흐름의 깊은 의미는 사용된다기보다 감상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수단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잊고, 수단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착각하면 허망한 삶을 낳는다. 처음에는 몰라도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 어느 먼 훗날, 목적을 잊은 수단의 쟁취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요즈음 나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 여럿 있다. ‘나 자신이 나에게 있어서는 사용용인가 감상용인가’ 하는 질문이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힌다. 나만을 위한 삶의 수단 쟁취에 내 삶이 종속된다면 나는 나를 사용하는 것이 되고, 남을 위한 삶의 수단 쟁취에 성공하면 나는 남의 감상용이 된다.

우리 모두의 삶을 통제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권력자라면, 그 권력자는 사용용 인간이어야 하는가, 감상용 인간이어야 하는가. 인간들은 힘 있는 사람을 이용해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뭇사람이 권력자를 사용하려 한다. 권력자는 좋은 의미로 뭇사람에게 사용될 수밖에 없다.

▼개체와 전체 조화시키는 지도력을 ▼

그러나 너무나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원하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다. 뭇사람에게 사용되는 것도 좋지만, 권력자는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권력의 자리를 떠난 후에도 국민 모두가 기릴 역사적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체와 전체를 조화시키는 힘이 없으면 어느 사회든 결국 무너진다. 우리 사회 구성원 ‘개체’의 행복과 우리 민족 ‘전체’의 행복 사이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권력자를 보고 싶다. 권력자의 자리를 떠난 후에도 인간됨과 초인간적 능력을 우리 모두가 감동 깊게 감상할 수 있는 권력자가 있다면, 바로 그런 권력자가 역사의 이름으로 ‘감상용 권력자’로 일컬어지지 않겠는가.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