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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심규선/‘破格’의 한계

입력 | 2003-03-30 18:44:00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닮은 데가 많다. 동시대에, 그것도 바로 이웃나라에 이처럼 닮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우선 두 사람의 경력이 그렇다. 노 대통령은 당에서 주요직책을 맡아본 적이 없다. 고이즈미 총리도 총리의 필수코스라는 간사장(사무총장) 정조회장(정책위의장) 국회대책위원장(원내총무) 중 어느 하나도 거치지 못했다. 한마디로 비주류였다.

두 사람 모두 각료를 지냈지만 주요 포스트는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이 유일하고, 고이즈미 총리도 후생상과 우정상밖에 지내지 못했다.

당 내 파벌이 없는 것도 비슷하다. 노 대통령은 당내 후보 경선에 나설 때 ‘단기필마’였다. 고이즈미 총리도 당 내에서 ‘헨진(變人·이상한 사람)’이라 불릴 정도로 독불장군이었고, 지금도 ‘무파벌’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예상을 뒤엎고 권력을 잡았다. 그 과정도 비슷하다. 국민경선이 없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도 일반 당원표의 비중을 높인 지방예비선거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총리는 꿈에 불과했다.

결국 두 사람을 선택한 것은 양국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였다. 양국 국민은 모두 ‘안정’보다는 ‘변화’를 택했고, 고이즈미 총리와 노 대통령은 그런 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기존의 세력이나 조직보다는 ‘노무현’과 ‘고이즈미’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인물 그 자체가 최고의 브랜드였음을 뜻한다. 그들의 경력, 성격, 지향점이 남들과 다르다는 ‘파격’이 곧 파워였던 셈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내달 26일이면 총리가 된지 2년이 된다. 장수총리에 속한다. 현 천황이 등극하면서 ‘헤이세이(平成)’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1989년 이후부터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하던 2001년 4월까지 전임 총리 9명 중 2년을 넘긴 총리는 없다.

그러나 장수총리의 요즘은 어떤가. 2년 전 출범 당시 고이즈미 총리 내각의 지지율은 모든 언론사 조사에서 역대 최고인 80%대 안팎을 기록했다. 하지만 20, 21일 일본 아사히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지지하지 않는다’가 45%로, ‘지지한다’의 42%를 앞섰다. 그의 인기는 취임 이후 계속해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하락은 물론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이 그에게 가장 기대했던 것은 경기회복이었다. 그러나 1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경기침체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실업률도 떨어질 줄 모르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오늘은 노 대통령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이즈미 총리는 경기회복에만 매달리면 됐는지 모르지만 노 대통령은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나 사회부문 등 모든 분야에서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세대간, 지역간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문제가 더 많다.

노무현 정부는 모든 부문에서 ‘건전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 대통령의 파격적인 행보나 발언도 그런 생각에서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 2년이 주는 교훈은 ‘파격’이 정권을 잡게는 해줬으나 그것이 성과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파격’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결국은 ‘파격’이 가져오는 유형 무형의 혜택을 모든 국민이 골고루 나눠 갖도록 하는 일이 노무현 정부의 목표가 돼야 한다. 명분없이 타협하거나 개혁의지를 거두라는 얘기가 아니다.

‘파격의 파이’가 얼마가 되든 그것을 나눌 때 여러 계층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편가르기’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규선 정치부장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