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21세기
이정우 조광제 등 지음/297쪽/1만4000원/소명출판
서울 인사동에 있는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 최근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9편의 논문을 싣고 있다. 이 중 정세근 충북대 교수(철학)의 ‘디지털 문화의 철학적 이해’,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여러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가 눈길을 끈다.
정 교수는 ‘주역(周易)’에서 디지털 사고의 한 동양적 원형을 찾고 있다. 주역의 부호는 단지 두 개뿐이다. 음을 나타내는 ‘--’와 양을 나타내는 ‘-’뿐이다. 이 부호는 함께 양의(兩儀)라고 일컬어진다. 태극은 하나로 이해되지만 태극 자체 내에 음양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역시 양의이다.
주역의 사고는 양의의 조합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주역은 주자(朱子)도 긍정했듯이 기본적으로 점보는 데 쓰였다. 만일 우리가 주역으로 점을 봐 얻은 결과를 놓고 그 괘나 효가 가리켜준 결과를 믿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가 음양으로 돼 있음을 믿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이 세계를 디지털 코드로 이해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양의를 자연계에 실재하는 것이며 결코 인식을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디지털 세계의 실재성에 나름대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이 원장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네 가지로 구별한다. 우리가 평소 ‘세계’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세계(現世界)를 말한다. 현세계는 일상과 상식의 세계다. 이를 세계Ⅰ이라고 부르자. 그러나 끊임없이 부유하는 현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전통사회에서는 이런 구조를 현세계를 ‘초월’하는 다른 세계, 즉 세계 Ⅱ에서 찾았다. 근대성은 세계 Ⅱ에 대한 거부로 특징짓는다. 근대적 사유의 특징은 미시세계로의 접근이다. 이제 사유는 상식의 세계 위로 날아오르기보다는 그 아래로 파고 들어간다. 미시적인 것들(∼子, ∼素 등)의 조합을 통해 거시세계가 설명된다. 이 과학기술의 세계를 세계 Ⅲ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세계, 가상현실 혹은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 Ⅳ는 세계 Ⅱ와 다르다. 가상세계는 비물질적 세계이지만 물질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비트의 세계다. 가상세계는 물질성을 초월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성에 의존하는 세계다. 세계 Ⅳ는 세계 Ⅲ과도 다르다. 세계 Ⅲ이 과학에 의해 발견되는 사물들의 세계라면 세계 Ⅳ는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는 허구적인 세계다.
이 원장은 ‘여러 세계 살아가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실세계를 절대화할 때 우리의 미래는 두렵고 불안한 것으로 다가온다. 초월세계를 절대화할 때 우리의 현실은 그림자로 전락한다. 미시세계를 절대화할 때 우리의 모든 의미와 가치는 환상으로 둔갑한다. 가상세계를 절대화할 때 우리는 전자회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알고리듬으로 해체된다.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