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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주역’으로 떠오른 386에게

입력 | 2003-01-08 19:22:00


386세대도 어느덧 40 안팎의 나이가 됐다. 그간 이 세대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지만 이번 대선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엄청난 변혁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화려하게 부각됐다. 정치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제 우린 이 세대의 동태를 부푼 기대 속에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승리의 세대’다. 변화무쌍한 격변의 시대에 이들은 용케도 언제나 승리의 주역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역경 헤친 실전경험 부족▼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4반세기에 걸친 민주화 투쟁을 승리로 마감했다. 화려한 88올림픽을 치르면서 한국호의 깃발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취업난이라니? 그런 말조차 없었다. 그리고 닥친 경제 위기, 구조조정의 한파도 사회 초년생인 이들 세대를 비켜갔다. 오히려 중고 세대가 물러간 자리를 메우느라 상승 기류를 타고 사회 중견으로 자리잡은 이들의 역동성이 경제 위기를 극복해냈다. 침체된 우리 경제에 정보기술(IT), 벤처산업으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간 이 세대는 문화산업도 주도해 왔다. 모든 방송광고(CM)의 표적이었다. 공연 소설 패션 커피맛까지 이들의 기호에 맞추어야 장사가 되었다. 그야말로 소비문화의 기수였다. 세계를 놀라게 한 월드컵, 그리고 개혁의 상징으로 젊은 대통령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새 정부의 국정 5년 청사진도 그리고 있다.

승승장구, 우리 사회의 중심 축이 이 세대로 옮겨가고 있다. 이들은 행운과 영광 속에 축복받은 세대다. 곱게 자라 패배와 좌절을 모르는 세대다. 실은 이 점이 걱정이다. 이게 이 세대의 취약점이다. 작은 문제에도 절망하지 않고 잘 헤쳐갈 수 있을지, 자칫 현실 감각이 없어 이상주의에 빠지지나 않을지 염려된다. 실전 경험도 그리 많지 않은 소장 교수들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주축을 맡고 있는 것도 이 점에서 걱정스럽다.

민주화 투쟁에 피 흘리며 쓰러진 선배 시대의 아픔도, 취업난 속에 좌절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후배들의 설움도 모르는, 시대의 행운아다. IT, 벤처, 맨주먹의 젊은 재벌들, 무슨 일에고 겁없이 도전한다. 뭐든 할 수 있다는 만능감, 하지만 이게 자칫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조숙한 실력자, 이들에겐 사회도 국가도 내가 만든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권력의 사물화(私物化)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두 대통령의 아들들이 이 ‘무서운 아이들’의 대표적 상징이다.

이 점, 386세대가 경계할 일이다. 지금까진 좋았다. 실수를 하더라도 기존의 수구 세력이 든든한 받침목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턴 사정이 달라진다. 이젠 그대들이 주역이요, 주인이다. 비판세력이 아니라 나라 살림을 맡아 국민의 복리와 안녕을 책임져야 할 ‘별 인기 없는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데, 난 지난해 말 베트남과 터키를 둘러보고 왔다. 세계 어딜 가나 온통 이라크전과 북핵 문제로 떠들썩했다. 온 지구촌이 이 문제로 난리인데 막상 귀국하고 보니 한국은 딴 세상 같았다.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한가로웠다. 촛불 시위에 반미 구호까지.

그럴 수 있는 세대가 부럽기도 하면서 또 한편 겁이 덜컥 났다. 그리곤 불현듯 60년대 후반, 미국 예일대에서 만난 베트남 고급 장교 두 분 생각이 떠올랐다. 전쟁이 막바지인데 군사학교도 아닌 이곳에 어떻게 유학을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두 분은 태연했다. “그야 당신네 문제 아닌가. 괜히 미국이 개입해서 문제가 생긴 건데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냐.”

▼무거운 책임 감당할 준비 됐는가▼

그러니 자기네는 뒷전에서 팔짱끼고 굿판 구경이나 하겠다는 뜻이다. 이러고도 전쟁에서 이긴다면 기적이다. 사이공 최후의 날, 마지막 탈출의 순간에 그 두 장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또 생각나는 건 어느 역사학자의 강연 대목이다. 지금껏 일본의 주요 언론에서 본격적인 반미 기사를 읽은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국소적 마찰이야 있었겠지. 자존심 상한 일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들은 실리를 위해서라면 지그시 감내할 수 있는 냉철함이 있다. 일본 국력이, 아니 자위대가 우리보다 힘이 약해서일까.

“한국에서 그렇게 싫다면, 오키나와만으로도 동북아 균형엔 문제없습니다.” 이 한마디에도, 대학 시절 미군 철수 반대 데모를 했던 필자로선 덜컥 겁이 난다. 그때와 지금 상황이 달라진 거라곤 없는데, 북핵의 위협말고는…. 이런 저런 걱정들이 수구 보수 세력의 소심한 공포증이기를 간절히 빌 뿐이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