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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언론자유만이 권력 견제"

입력 | 2002-12-31 16:46:00


《한국은 새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취임과 함께 새 정치시대를 열게 된다. 낡은 정치의 청산을 주창해 온 노 당선자는 과연 어떤 자세로 국가를 이끌어야 할까. 한국 정치에서 논란이 돼 온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서 마이어 슐레신저 주니어(85)로부터 이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았다. 대화는 동아일보의 해외 칼럼니스트인 피터 벡(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 실장)과의 전화 대담 형식으로 이뤄졌다. 대담을 한 2002년 12월 19일은 마침 한국의 대통령선거일이었다. 은퇴 후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회고록을 집필 중인 슐레신저 박사는 “오늘은 한국인들에겐 무척 중요한 날인데 누가 대통령에 당선됐느냐”며 한국 정치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피터 벡〓슐레신저 박사께선 1973년 출간한 ‘제왕적 대통령 통치(The Imperial Presidency)’라는 저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을 만든 장본인이다. 미국의 경우 제왕적 대통령은 대개 국제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의회를 존중하지 않는 대통령을 지칭하지만 한국에선 대통령이 국내문제에서 너무 강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제왕적 대통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아서 슐레신저〓미국은 입법 사법 행정부의 권력 분립에 기초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갖고 있다. 권력 분립은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완전히 충분하지는 않지만 위기 국면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견제 효과가 있다. 물론 의회는 9·11 테러와 같은 위기에 직면할 경우엔 대통령의 결정에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의 하나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는 언론이다. 한국엔 언론의 자유가 없는가.

▽벡〓매우 예민한 문제이다.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언론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 김 대통령이 동아일보 등 주요 언론사를 상대로 실시한 세무조사의 경우 언론을 위협하기 위한 의도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슐레신저〓그런가. 언론의 자유는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이다. 권력의 오만함을 지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언론이 중요하다.

▽벡〓미국의 대통령들을 연구한 학자로서 한국의 노 대통령당선자에게 조언할 것이 있다면….

▽슐레신저〓미국의 역사학자인 헨리 애덤스는 ‘대통령은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과 비슷하다’고 말한 바 있다. 대통령은 방향타와 키, 그리고 정박하고자 하는 항구를 갖고 있어야 한다. 효율적인 대통령은 가고자 하는 방향과 항구가 타당하고 합리적임을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윌슨, 루스벨트, 케네디 등의 대통령이 전세계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들이 수단을 사용할 때는 현실적이고, 목표에선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지적 능력과 지적 호기심은 필수적이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항상 참모들간의 지속적인 논쟁에 휩싸여 왔다. 대통령은 그같은 논쟁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벡〓노 당선자는 취임 후 여소야대의 정국에 대처해야 한다. 여소야대는 대통령에 대한 견제 면에서 효율적인가, 아니면 국회와 대통령의 대결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가.

▽슐레신저〓여소야대는 대통령에 대한 분명한 견제를 제공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선 흔한 현상이었다. 미국의 여소야대는 냉전 시대 기간 중 태동한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반동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소야대엔 부정적 측면도 있지만 이는 대통령이 국가를 이끌려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다.

▽벡〓미국이 이라크 사태 등 국제위기에 대처하는 것을 과거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처한 것과 비교한다면….

▽슐레신저〓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이 취한 조치를 이라크에 대한 선제 공격을 고려하는 근거로 제시해왔다. 그러나 실제론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제재와 봉쇄를 군사 행동의 대안으로 취한 것이지 선제 공격을 한 것은 아니다. 선제 공격의 예로는 일본에 의한 진주만 공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벡〓그렇다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공격 계획은 미국이 걸어온 역사적 전통에 어긋나는 것인가.

▽슐레신저〓그렇다. 이는 공화당의 첫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신에도 반하는 것이다. 링컨 대통령은 의원 시절이었던 1848년 당시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에 반대하면서 “대통령이 침략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이웃 나라를 침공하도록 허용한다면 국민들은 장차 대통령이 재미삼아 전쟁을 일으킬 경우에도 이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미국을 세운 선조들은 어느 누구도 전쟁을 국민에게 강제할 수 없도록 헌법상의 제약을 두기 위해 노력했었다. 냉전시기에도 예방적 전쟁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있었으나 이는 궤변으로 간주됐었다.

▽벡〓이라크와 알 카에다간의 연계가 없음에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이라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슐레신저〓미국인들은 유엔의 테두리 안에서 하는 전쟁만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방적인 전쟁에 대한 지지율은 4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이유의 하나는 신속한 승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걸프전은 몇 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몇 달 만에 끝났고 희생자도 적었다. 미국인들은 이라크와의 전쟁도 유사하게 진행돼 사담 후세인이 곧 몰락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벡〓9!?11테러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슐레신저〓진주만 공습 때 미국은 우리의 적과 목표를 뚜렷이 인식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적은 그늘에 숨어 우리를 공격한다. 9·11은 또 부시 대통령을 우연히 당선된 대통령으로부터 진정한 지도자로 변모시켰다. 우리는 이제 부시 대통령을 진지하게 대해야만 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때론 힘들긴 하지만.

▽벡〓테러와의 전쟁이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로 치달을 개연성에 대해선….

▽슐레신저〓역사적으로 볼 때 이슬람교도들이 크리스천이나 유대교인들보다 더 관용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5세기간 지배했던 때가 대표적이다. 이번 전쟁을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몰고간다면 큰 실수가 될 것이다. 반면 근본주의는 총체적인 위협이다. 전능한 신의 뜻을 집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는 온건한 이슬람 신자들이 광신도들에 맞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벡〓최근 한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반미감정이 급증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한국 등 동맹국들은 물론 미국의 적이 미국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슐레신저〓체니 부통령과 럼즈펠드 장관은 군사 승리가 미국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믿고 있다. 후세인을 몇 주 안에 제거할 경우 아랍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고 우리 동맹국들에도 확신을 줄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전쟁 후의 재건작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는 체니 부통령 등의 전략이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나 그들은 성공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국가들은 세계 속에서 미국의 위상과 부에 시샘을 느낄 수도 있다. 힘을 행사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미국 대중문화의 확산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아야 한다.

▽벡〓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힘을 강화하려 함에 따라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막강한 힘을 제왕처럼 과잉 사용(imperial overstretch)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는데….

▽슐레신저〓미국이 어떻게 힘을 사용하는가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가 자제력 있고 슬기롭게 다른 국가들의 국익을 존중하면서 힘을 사용할 것인지 또는 깡패처럼 힘을 행사할 것인지에 따라 다른 국가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릴 것인지 여부가 결정된다.

▽벡〓미국의 패권이 무한정 계속될 수 있을까. 언제쯤 중국이 미국에 도전할 것으로 보는가.

▽슐레신저〓미국은 무한정 패권을 갖고 있을 수 없다. 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오랜 기간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생각되나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중국이 단결한다면 미국에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은 소득 계층 지역간 분화가 워낙 크다. 중국보다는 유럽이 미국의 우위에 도전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벡〓새해 전망은….

▽슐레신저〓나는 21세기의 시작이 낙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유엔의 동의가 있든 없든 아마도 1, 2월에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이라크전이 단기간에 끝나 사람들이, 미군이든 이라크인이든 많이 죽지 않기를 기도한다. 전쟁 후에 미국은 이라크 재건의 책임을 일부 떠맡아야 하나 과연 그럴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나는 단기적으론 비관론자이고, 장기적으로 낙관론자이다.

정리〓한기흥 워싱턴특파원

eligius@donga.com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아서 슐레신저

美 진보주의 역사학의 거목

'제왕적 대통령'표현 처음 써

아서 마이어 슐레신저 주니어는 활발한 저술 활동과 정치 참여를 통해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20세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이다.

1917년생인 그는 1938년 하버드대를 졸업한 직후부터 탁월한 저술과 비평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정보장교로 복무한 뒤 46년부터 61년까지 모교인 하버드대의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부친인 아서 마이어 슐레신저(1888∼1965)도 당시 하버드대 역사교수였다.

진보적 사관을 갖고 있던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 라틴 아메리카 문제를 취급하는 백악관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그는 이에 대해 뒷날 “나는 기질적으로 현실 참여를 좋아한다”며 “학문과 현실 참여가 상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두 차례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겨준 ‘A Thousand Days’와 ‘The Age of Jackson’을 비롯한 16권의 저서가 있다.

대담 = 피터 벡

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