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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우병치료제 에이즈 감염 충격]보건당국 2년간 소극조사

입력 | 2002-09-13 06:48:00


《미궁에 빠졌던 혈우병 청소년들의 에이즈 집단감염 사건이 거의 10년이 지나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당시 생산된 국산 혈우병 치료제 원료에 에이즈 감염자가 매혈한 피가 섞여 들어갔고, 과학자들이 첨단 게놈 해독 기술로 이 매혈자와 혈우병 환자들의 에이즈 바이러스 염기서열을 분석해 공통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비록 오래된 감염 사건이지만 당시 바이러스에 감염된 청소년들은 어른이 된 최근에야 에이즈 증상이 나타나 고통을 겪고 있다. 에이즈는 감염 후 거의 10년이 지나야 증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면서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사건은 한 국내 제약사가 91년 초 B형 혈우병 치료제인 ‘혈액응고 제9인자’를 생산하면서 시작됐다. 93년까지 이 주사제로 치료를 받은 국내 B형 혈우병 환자 120여명 가운데 15%인 18명이 무더기로 에이즈에 감염됐다.

당시 혈우재단에 등록된 환자는 A형 혈우병이 750여명으로 B형보다 훨씬 많았지만 A형 혈우병 환자는 0.1%인 1명만 에이즈에 감염됐다. B형 환자의 에이즈 감염률이 100배 이상 높았던 것.

당연히 국산 B병 혈우병 치료제에 의심의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보사부는 92년 12월 조사위원회(위원장 이성우 당시 국립보건원장)를 구성해 2년 동안 이 회사의 혈우병 치료제 생산시설을 조사하고 감염자에 대한 역학조사를 벌였다.

당시 일부 조사위원은 역학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국산 혈우병 치료제 생산을 일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단을 요구했던 서울대 의대 최강원 교수(감염내과)는 “국립보건원이 조사에 소극적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보사부와 국립보건원은 94년 혈우병 환자가 국산 제품 외에 수입 치료제도 함께 사용했고 자주 수혈도 했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다며 조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이번에 혈액 샘플이 보존된 환자에 대한 분자 유전학적 연구를 통해 감염자 대부분이 외국에는 없는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매혈자와 감염환자의 바이러스 염기서열에 유사성이 발견됨으로써 정부의 재조사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번처럼 에이즈 바이러스 유전자 염기서열의 유사성으로 한 치과의사가 환자 5명에게 에이즈를 퍼뜨린 것을 입증해 배상까지 연결된 사례가 있다.

▽수혈 감염 가능성도〓울산대 의대 조영걸 교수는 국산 혈우병 치료제가 원인이라고 보는 반면 서울대 김선영 교수는 “혈우병 환자는 혈장과 혈전 등을 자주 수혈한다”며 수혈로 인한 감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감염사건 당시 조사 용역을 수행했던 김 교수는 94년에도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조 교수는 “수혈이 감염의 원인이라면 A형과 B형 혈우병 환자 모두에게 에이즈가 집단 발생했어야 하는데 B형 환자에게만 에이즈 감염이 집중된 것을 볼 때 수혈이 원인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또 당시 작성된 역학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에이즈에 걸린 혈우병 환자는 감염되지 않은 혈우병 환자보다 국산 혈우병 치료제의 주사량이 2배나 많았다.

▽2개월 사이 15번이나 매혈〓당시 이 제약회사는 치료제 원료인 혈장에 대해 모두 에이즈 항체검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매혈자 2명은 항체가 형성되기 이전 단계의 초기 에이즈 감염자로, 여러 차례 매혈을 했지만 마지막에만 양성반응을 보였다. 에이즈 항체가 형성되는 데는 감염 뒤 보통 6∼14주, 길게는 2년이 걸린다. 에이즈 감염자 김모씨는 90년 1∼3월에 무려 15번이나 매혈을 했고 이 가운데 3번의 매혈분이 B형 혈우병 치료제의 원료로 쓰였다.

비록 수천 개의 혈액 원료 중 몇 개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하더라도 이 제약회사는 가열과 살균 처리를 통해 바이러스를 불활화(不活化)할 수 있는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공정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초기 생산단계에서는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고 당시 조사위원들은 지적한다. 실제로 사고가 나자 외국 기술진을 불러 생산공정을 점검하고 매혈 행위를 중단시킨 뒤로는 혈우병 에이즈 환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국내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자 10명은 1인당 3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혈우병 어린이와 청소년을 둔 부모는 고통스러운 ‘유전병’을 물려준 데다 ‘에이즈’까지 걸리게 해 미안한 나머지 자식에게 감염 사실조차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동호 동아사이언스기자 do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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