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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이세돌 급습…이창호 굳히기

입력 | 2002-08-18 17:53:00

이세돌 3단(왼쪽)이 패배를 확인한 뒤 머리를 감싸안으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제공 한국기원


이창호 9단은 문득 손길을 멈췄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살기(殺氣). 겉으론 아무런 조짐도 없지만 초절정 고수의 후각은 숨겨진 살기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중앙 백진 한켠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장은 상변이지만 상대의 비수는 중앙을 향해 있었다.

13일 열린 36기 왕위전 도전 5번기 최종국. 국내 도전기에서 98년 이후 14연승을 거두고 있는 이 9단.

최근 KTF배와 일본 후지쓰배에서 우승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이세돌 3단.

이 대결에서 이 3단이 승리한다면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 수 있기 때문에 팬들의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9단은 장고에 들어갔다. 정상적이라면 장면도의 ‘가’에 둬야 한다. 그러면 여전히 5∼6집을 앞서 갈 수 있다. 하지만 이 9단은 눈은 중앙을 오가고 있었다.

‘나’와 ‘다’의 선수를 바탕으로 중앙 백집에서 수단을 부리는 상대의 급습을 눈치챈 것이다. 이윽고 이 9단의 손길은 백 1로 향했다.

대신 상변에서는 딱 두집 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지는 수모를 감수했다. 이 9단의 계산으로는 이렇게 돼서 1집반 정도 유리하다는 것. 비록 몇집을 손해보더라도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하는 이창호 바둑의 본령이 다시 한번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 9단은 국후 “수상전을 하면 유가무가로 이길 것 같았지만 초읽기에도 몰렸고 혹시 생각지 못한 변화가 나올지 몰라서…”라고 말했다.

중앙의 지뢰를 제거한 이 9단은 성큼성큼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차이는 미세하지만 이 9단은 그 한걸음을 지켜내고 있었다.

‘불패소년’ 이 3단의 도전은 ‘상상초월’이었다. 무난한 수순을 따른다면 지는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이 서자 천변만변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곳에 지뢰를 묻고 저곳에 함정을 파고 상대의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기 위해 뻔한 수순마저 비틀었다.

불리한 바둑을 역전시키는 조훈현 9단의 ‘흔들기’에 못지않게 이 3단의 ‘비틀기’에 웬만한 기사라면 한번 걸려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9단은 절대 1집반의 차이를 양보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지뢰밭을 통과하고 정확하게 덫을 피했다.

이날 대국에서 이 3단은 ‘그가 왜 강한지’를 보여줬다면 이 9단은 ‘그가 왜 세계 1인자인지’를 보여줬다.

끝내기에서 패를 버티던 이 3단이 2집 손해를 보는 바람에 차이는 3집반.

대국이 끝나고 이 3단은 주위를 향해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처절한 승부의 끝이 웃음이라는 것은 의외였다.

이번 도전기를 통해 이 9단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냐고 물었다.

“아쉬워요, 특히 마지막 대국은 더욱….”

동문서답식이었지만 그는 이미 ‘다음엔 이긴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