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계에선 치맛바람보다 바짓바람이 더 거세다. 어릴 적부터 기재가 뛰어난 기사들은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워 아버지의 적극적인 열성과 노력으로 프로기사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바둑도 잘 모르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위로해준 어머니들의 노력 역시 보통이 아니다. 최근 프로기사 어머니 10여명이 ‘모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17세 동갑내기인 최철한 4단, 원성진 3단, 박영훈 2단과 이들보다 한 살 많은 박정상 2단 등 요즘 가장 성적이 좋은 신예 기사들의 어머니들을 만나 아들을 프로기사로 키우면서 느꼈던 고민과 애환을 들어봤다.》
# 프로기사 어머니들
이미순 , 박은규 , 윤재경 , 최민경 (위 사진 오른쪽부터)
-네분이 특별히 친하다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박은규〓조한승 4단 어머니를 포함해 5명이 특히 친한 편이이에요.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벌써 10년이상 지났네요. 한국기원 연구생 시절 아이들을 기원에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뭐 할 일이 있어야지요. 얘들끼리 나이도 비슷하고 고민도 같아서 서로 통성명도 하고 수다도 떨고 쇼핑도 하고 하다보니 친해졌죠. 학교도 충암중·고를 같이 다녔고. 누가 좋은 성적내면 한턱 쓰는 것 외에도 한달에 한번씩은 꼭 만나요.
-최철한 원성진은 입단을 쉽게 했지만 박영훈 박정상은 기재에 비해 입단이 늦었는데요.
▽박〓영훈이는 중간에 연구생을 포기하고 아마추어 생활을 했죠. 그 때 아마대회에 많이 나갔는데 지방에서 열리면 제가 차로 지방까지 데리고 갔어요. 예선에서 떨어지면 한밤중에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데 그게 가장 힘들었어요. 그래서 ‘우승 못해도 좋으니 예선만 통과해라’고 했죠. 영훈이가 14전 15기만에 입단을 했는데 한 때 남편도 포기하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고생한 게 너무 아깝다. 여기서 포기해선 안된다’고 반대했죠.
▽최민경〓정상이도 입단을 힘들게 했어요. 아들의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저는 편지를 썼어요. 지금까지 한 500여통 되나요. 내용은 ‘사랑한다, 힘내라’하는 수준이었는데 정상이도 고마운지 답장을 하더라구요.
▽이미순〓영훈이와 정상이에 비하면 철한이는 일찍 입단했어요. 저는 별로 고생안했어요.(웃음)
-아버님들이 적극적으로 바둑을 가르쳤죠.
▽윤재경〓성진이 아버지는 바둑학원을 운영해서 큰아들 성욱이와 성진이 둘 다 바둑을 가르쳤죠. 성욱이도 연구생이었는데 입단이 늦어져 포기하고 공부로 방향을 돌렸어요.
▽최〓정상이 아버지는 교감선생님인데 바둑을 못두세요. 초등학교 때까지만 아들에게 바둑을 두게 하고 나중엔 공부를 시키려고 했죠. 그런데 정상이가 ‘아버지가 정 반대하면 소원대로 대학에 가겠지만 그 때부터 다시 바둑을 시작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통에 바둑 두는 걸 허락했죠.
오른쪽부터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박정상
-그래도 아들이 정상적인 학업을 포기하고 바둑을 택하게 된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셨을 텐데요.
▽박〓처음엔 그랬죠. 하지만 선생님들이 기재가 뛰어나다고 해서 포기시키기가 어려웠어요. 한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들 많이 하잖아요. 요즘은 영훈이에게 ‘좋아하는 바둑 실컷 두면서 돈도 버는 좋은 팔자’라고 말해요.
▽이〓아이들이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못하잖아요. 바둑에만 몰두하다보면 생활이 외골수가 될까봐 걱정이예요. 성격이 모나지 않게 자라고 세상 돌아가는 일도 잘 알게 하는 게 엄마들의 가장 큰 바람이예요. 그래서 뉴스도 보게하고 책도 사주고. 참, 따로 선생을 붙여 4명이 같이 영어회화 공부도 시키고 있어요.
-아이들이 지고 들어온 날은 어떤가요.
▽이〓최근에 KT배 결승 최종국에서 조훈현 9단에게 져서 준우승에 그쳤어요. 유리한 바둑을 져서 상당히 괴로울텐데도 내색을 안하더군요.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평생 바둑을 둘 텐데 한두판 졌다고 너무 아파하는 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철한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최〓정상이는 좀 괴로워하는 편이예요. 특히 어이없는 실수로 졌을 때는 며칠씩 여파가 미쳐요. 그땐 아까처럼 편지를….
▽윤〓최근에 조한승 4단과 신예 최강전을 둔 적이 있는데 인터넷으로 바둑을 보니까 한수 한수 정말 힘들게 두는 거 같더라구요.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팠죠. 하지만 성진이가 돌아왔을 때 ‘그래도 친한 형이 먼저 땄으니까 잘됐다. 너는 나중에 따면 된다’고 위로해줬어요.
-아이들끼리 중요 대국에서 바둑을 둬서 승패가 갈리면 어머니들도 서로 민망하거나 하지 않습니까.
▽박〓저희들도 단련이 되는 거 같아요. 언젠가 LG배 세계대회 예선 결승에서 정상이가 영훈이를 이겼는데 본선 첫판에서 졌어요. 그래서 정상이 엄마한테 ‘그럴 거면 왜 이겼냐. 영훈이가 올라갔으면 좋은 성적 냈을텐데’하고 농담을 하기도 했어요.
-어머니들은 바둑을 좀 두시나요.
▽윤〓저는 바둑 교실에서 좀 배워서 4급 정도, 철한이 어머니가 7급, 나머지는 못둬요. 최근에 제가 인터넷 등으로 둔 바둑을 보여줬더니 ‘엄마, 행마가 많이 좋아졌어요’라고 하데요.
▽박〓저는 바둑은 못둬도 관전은 9단이예요. 하도 아들 바둑을 많이 보다보니까.(웃음)
-아들 하나가 더 있으면 바둑을 시키시겠어요.
▽윤〓저는 아들 둘을 바둑시켜 봐서 이제 더이상 시키고 싶지 않아요.
▽박〓저는 이제 노하우가 쌓여서 잘할 것 같은데요.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