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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한류 열풍, 이번엔 만화 차례!

입력 | 2002-03-14 16:33:00


사인회 2시간 전부터 몰려든 팬들. 대만의 모든 일간지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자회견과 “결혼은 했나요?” 같은 호기심 어린 질문들이 폭주한 생방송 인터뷰, 짧은 체류 기간을 꽉 채운 빡빡한 공식 일정…. 대만의 ‘한류’(韓流) 열풍은 역시 대단했다. 그런데 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들이 가수나 배우가 아니라 만화가라면?

지난 2월19일부터 24일까지 대만에서 열린 ‘제10회 타이베이 국제 도서전’에 초청된 양경일 윤인완 박철호 황정호 등 4명의 한국 만화가들은 기대 이상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행사기간중 대만의 주요 일간지인 ‘자유시보’ ‘대만신문보’ ‘중화일보’가 한국 만화에 대한 특집 기사와 작가 인터뷰를 실었다. 대만은 만화 월간지가 발행될 정도로 출판만화의 고정적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는 국가다. 그러나 자국 만화가는 거의 없다. 자연히 일본 만화가 시장의 90%를 점유한다. 태국 홍콩 인도네시아 등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일본 만화 텃밭서 연일 상한가▲

그런데 최근 한국 만화들이 이 시장에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며 떠오르고 있다. ‘열혈강호’ ‘가디록’ ‘짱’ ‘힙합’ ‘비천무’ ‘황토빛 이야기’ ‘Let 다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등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은 대부분 동남아 각국에 단행본으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양경일 윤인완의 ‘아일랜드’가 일본에 이어 미국에서 출판되었으며, 원수연의 ‘풀하우스’와 서현주의 ‘I wish’는 올 3월에 한국 만화 최초로 중국에서 출판된다.

“한국 만화는 재미에서 일본 만화에 뒤지지 않는 대신, 일본 만화에 난무하는 과도한 폭력이나 섹스 장면이 없습니다. 이 같은 점이 보수적인 동남아 독자층에 호감을 준 듯합니다. 반면 일본 만화는 ‘슬램덩크’와 ‘드래곤 볼’ 이후 뛰어난 작품이 없어 정점을 지났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대원씨아이 권낙환 팀장은 한국 만화의 해외진출 전망을 낙관했다.

한국 만화의 동남아 진출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시장이 인구 13억명의 엄청난 잠재시장 중국의 교두보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일본 만화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만화 역시 중국 정부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지역별로 수입 제한 정도가 조금씩 다릅니다. 원수연과 서현주의 만화가 출판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중국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서울문화사 조병권 팀장의 설명이다.

한국 만화의 해외 진출은 동남아와 중국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 소수에 그치고 있지만 황미나의 ‘이씨네 집 이야기’, 양재현 전극진의 ‘열혈강호’ 등 만화의 본고장인 일본의 만화잡지에 연재된 작품도 있다.

‘아일랜드’는 일본 NHK 방송의 만화토론 프로그램인 ‘BS 만화야사’에 등장해 섬세한 그림체,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스토리 등에서 호평을 얻었다.

한국 만화의 해외 진출이 중요한 것은 다른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한국시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만화가 한 사람이 모든 작업을 다 하던 과거와 달리 최근의 만화시장은 기획과 스토리, 그림, 어시스턴트, 출판 등의 다양한 분야로 분화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좀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해외시장 개척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전략이 아직 부족하다는 점. 처음부터 출판사가 투자 전략을 세우고 해외 진출용 작품을 만드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출판사의 역할은 국내 만화의 판권을 파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만화의 정체성을 찾는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해외에서 한국 만화를 환영하는 이유는 한국 만화가 일본 만화와 잘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이죠. 또 한국 만화는 대중의 인식이 아직 낮고 다양한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으며, 만화가의 교육체계도 정비해야 하는 등의 기본적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다 갖춰져야 결국 해외 진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의 지적이다.

그동안 한국 만화는 검열과 대여점 문제, 해적판 등 끝없는 악재와 외부 압력에 시달려 왔다. 만화가들이 해외로 눈 돌린 것은 어쩌면 자신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 국내의 현실에 절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만화는 동남아는 물론, 중국과 만화왕국 일본에서까지 당당히 어깨를 겨루기 시작했다. 작지만 소중한 성과를 이룬 한국 만화. 이만하면 ‘한류’의 대열에 충분히 합류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전원경 주간동아 기자 winnie@ 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