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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서현/우리들의 초라한 건축가

입력 | 2001-04-11 18:47:00


2000년 2월 16일. 천년의 문 현상설계의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당선작은 응모안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런 만큼 다른 현상설계에서 번져 나오던 로비와 뒷거래의 소문도 발붙일 구석이 없었다. 필자의 응모안도 낙선작 안에 끼어있었다. 당선작은 이의가 없을 만큼 훌륭한 안이었다.

▼1년만에 '닫힌' 천년의 문▼

모작 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굴렁쇠는 작아지면 반지가 되고 커지면 천년의 문이 되는 것이니 모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불만의 소리가 계속 비집고 나왔다. 정부가 주도해서 이런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전체주의 시대의 발상이 아니냐고 따졌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장안에 얼마나 많은 데 이런 데 돈을 쓰느냐고 물었다.

건축가가 제시한 안은 찬반이 극렬히 나뉠 만큼 도발적이고 개성적이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거대했다. 반대 의견은 천년의 문이라는 발상 자체에 대한 회의이기도 했지만 당선안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했다. 건축가의 아이디어는 엔지니어링의 틀과 잘 맞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명쾌한 계획안은 구조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았다. 물리적 요구에 따라 형태는 덜 명쾌하게 변했다.

2001년 3월 28일. 천년의 문 건립계획은 백지화되었다. 예상 공사비가 늘어나고 준공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원래 현상안의 모습이 훼손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례가 없는 위험한 일이라는 점도 거론되었다. 실없는 정부라는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용기있게 중단한다고 했다.

그렇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에 무제한의 재정지원을 요구할 수는 없다. 선거를 통해 형성되는 정부에게 월드컵 중계방송 화면에 공사중인 구조물이 들어오는 걸 양해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어렵다.

한치 앞만 이야기하던 사회에서 100년에 걸쳐 완성할 구조물을 만들자는 것은 분명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정부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계획안을 당선시켰다고 심사위원들에게 손가락을 돌릴 수도 없다. 항상 무난하고 보통에 가까워야 최선이라고 믿던 사회에서 이런 당선안을 선정한 점에서 오히려 심사위원들은 갈채를 받아야 한다.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구조물이라고 비난해도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엔지니어링이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시대를 앞서 간 계획안, 혹은 전체주의를 연상시킬 만큼 시대에 뒤쳐진 계획안을 제시했다고 비난하면 그것은 건축가의 책임이다. 책임 없이 권리만 주장하는 이들이 기형적으로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건축가들 역시 그 동안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데 인색해 왔다. 권리도 줄어들었고 사회적 역할도 축소되었다. 그런 만큼 지금 비난이 있다면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열 두 개의 대문을 100년에 걸쳐 꼼꼼히 짓겠다고 하면서도 첫 대문만은 월드컵 경기에 맞춰 서둘러 지어야 한다는 조건은 분명 모순이었다. 대지 조건도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고 이에 따라 계획안이 바뀌면서 늦어진 책임도 건축가의 몫이라고 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중지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용역비도 지급할 수 없다고?▼

이 사회에서 건축가의 위치는 백지화 과정에서 선명히 드러났다. 설계를 진행하던 건축가의 의견은 청취되지도 반영되지도 않았다. 건축가는 신문 보도를 통해서야 백지화를 알게 되었다. 예산과 기간에 관한 대안은 없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계획이 중지되었으니 용역비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은 부동산 중개사와 건축가가 같은 보따리 안에 들어있는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사건이다.

천년의 문은 닫혔다. 그 닫힌 문 앞에서 많은 사람이 아쉬워하고 있다. 이것이 가치다. 전통적인 문양, 청자의 곡선을 갖지 않는 새로운 구조물로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겠다는 데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 가치다.

우리의 미래를 믿는다면 우리의 현재를 이 땅에 남기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새로운 계획안을 내는 것은 건축가의 몫이고 여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거듭 천년의 문은 아름다운 계획안이었다.

서현(건축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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