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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노조사건 최종선씨 증언 전문]

입력 | 2001-03-19 10:48:00


1. 개인적인 소회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뒤늦게나마 동일방직 노조사건에 대해 진술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이 사건에 대해 진술하게 된 경위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3월14일 저의 수기 '산자여 말하라 : 나의 형 최종길교수는 이렇게 죽었다'의 출판기념회를 가진 뒤 뒤풀이장소에서 정말 우연히도 '최종길교수 고문치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의 이광택 실행위원장(국민대 교수)이 동일방직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이 교수 등으로부터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달라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심의원원회'에 대한 관련자들의 신청이 기각될 상황에 처해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 사건이 노-노 갈등과 노-사 갈등을 넘어서서 노-정 갈등의 내용도 갖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이 사건이 진행되던 78년초부터 81년초 퇴직시까지 중앙정보부 경기도지부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78년 중반까지는 경기도 노사문제 담당관의 보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사문제 담당관은 2명이었는데 다른 한 사람은 항만노조만 담당하고, 그 외의 노사문제는 모두 제가 맡게끔 업무가 분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78년 2월21일의 소위 '똥물 투척사건'을 전후한 시기의 동일방직 사건의 경과를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진술하고자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제가 수기를 출판하면서 당초에는 동일방직 사건을 내용 가운데 포함시키려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최종길교수 사건' 자체보다 나 자신을 너무 앞세우는 감이 없지 않아 마지막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던 것입니다. 또 '범죄적 공작은 보호할만한 값어치가 있는 기밀이 아니다'라는 게 저의 분명한 생각입니다만 과거 정보기관의 직원으로서 근무중의 일을 일일이 설명하는 듯한 행위에 마음의 부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뜻하지 않게 동일방직사건 관련자들의 가슴 아픈 상황을 전해듣고 이 문제에 대해 진술하는 것만은 저에게 '피할 수 없는 잔' 또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을 갖게끔 되었습니다.

또한 저의 형님 고 최종길 교수 사건의 경우에는 간절히 양심선언과 협조를 호소하면서, 제가 124명 억울한 분들의 억울한 사정을 보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에서 더욱 굳은 결심을 하고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2. 내가 아는 동일방직 사건

A. 저는 인천 부임 이전의 '이영숙 집행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78년초 저는 인천에 부임한 직후 동일방직 노조의 이총각 지부장과 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 등과 전화통화해 "앞으로 내가 담당자"라는 인사를 나눈 적이 있으며, 그 뒤 이 지부장과는 직접 만나 "'유신체제 철폐'와 '박정희정권 타도' 요구만 하지 말라. 그것은 일선 담당관 차원에서 봐줄 성격의 일이 아니다. 그 외에는 다 도와주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당국과 노조 사이에 일종의 평화협정을 맺은 격이었습니다. 사실 그 이후 한두 달은 서로 특별히 요구할 것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B. 문제가 생긴 것은 소위 '똥물 투척사건'이 일어나기 2주쯤 전인 2월초였습니다. 보안사 인천지부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최형, 우리에게 거동수상자 보고가 왔는데 아무래도 우리 소관(군관계)은 아닌 것 같고 최형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알려준다"며 인천 신포동 뒷골목의 배명여관에 거수자들이 집단으로 기거하며 들락날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정보기관 간의 정보전파의 일환이었습니다. 즉시 경기도경 정보과에 확인을 시킨 결과 "입장이 곤란하다"며 이상하게 쭈뼛거리는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할 수 없이 제가 직접 배명여관으로 나가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한눈에 건달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여럿 들락날락 하는 모습이 금방 눈에 띄었습니다. 여관 종업원과 그들에게 "누가 책임자냐"고 물으니 '작은 덩치에 가죽 모자를 쓰고 개털 잠바를 입은 사람'과 '체격이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이 나섰습니다. 제가 '중정 인천조정관'이라고 신분을 밝히며 이들에게도 "신분을 밝히라"고 했으나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을 인천시청쪽의 인천호텔로 데려가 빈방을 얻은 뒤 셋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재차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밝히지 않을 경우 강제구금하겠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자 이 두 사람은 그때서야 "정말 우리가 누군지 몰라서 묻느냐" "위(중정 2국을 지칭)에서 다 알고 있다"면서 체격이 작은 사람은 자신을 '전국섬유노조 조직국장 우종환'이라고, 체격이 큰 사람은 자신을 '조직행동대장 맹원구'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당신들 뭣하러 왔느냐"는 질문에는 "동일방직 노조 깨부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명색이 중앙정보부 경기지부의 노사문제담당관인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이 벌써 며칠전부터 서울에서 내려와 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로봇이 된 느낌이었고, 우종환과 맹원구 두 사람은 마치 대단한 특명이라도 받고 온 양 "서울 본부에 물어보라"는 식으로 거만하게 행동했습니다.

C. 저로선 상당한 긴급상황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내용의 진위도 확인하고 판단도 세워야 하겠기에 간석동 경기지부 사무실로 돌아와 최모 지부장과 허모 정보과장에게 즉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울의 본부에까지 전달된 이 보고서에서 저는 장단점 분석을 하며 대강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을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총각 지부장, 조화순 목사 등과 지금 평화상태인데 구태여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 공연히 건드려 화근을 만들 이유가 없다. 만약 섬유노조 내부의 조직분규라면 우리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등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이같은 의견을 내놓게 된 배경에는 '일은 본부에서 일으키고 그것이 제대로 안되면 지부가 다 뒤집어쓰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강력한 '중지'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두세 차례 쓰고 그런 과정에서 본부 2국(보안정보국) 경제과의 최모 담당관과도 한두 차례 통화했습니다. 본부와 지부 사이에 의견조정이 되지 않자 결국 본부로부터 "경기지부는 이 일에 빠지라"는 연락이 왔고 저는 마침내 "빠지겠다"는 보고서까지 썼습니다.

D. 그렇게 하고 나서 저는 경기도 노동대책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회의 멤버는 경기도 보사국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중정 조정관, 도경 정보과장, 노동청 지방사무소장, 인천시 관계관, 인천 동부경찰서장 등이었습니다. 장소는 간석동 중정 경기지부 사무실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앞으로 별명이 있을 때까지 송현동 동일방직에는 동서기 한명도 넣지말라"는 조정안을 내놨습니다. 노사분규와 관계없이 수재의연금 받으러도 들어가지 말라는 식이었습니다. 자칫 인천지역 공무원이 동일방직 내부에 들어가 있을 때 무슨 문제가 터지면 그 책임을 중앙정보부 경기지부가 뒤집어쓰게 되니 근본적으로 그런 일을 막자는 취지었습니다. 그 뒤 정말 경찰관은 물론이고 어느 공무원도 한동안은 동일방직 내부에 들어간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 2월21일 노조의 지부장 및 대의원선거를 2,3일 앞두고 이총각 지부장이 위기감을 느꼈는지 관할경찰서에 집회보호요청을 해 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기서 사단이 벌어집니다.

인천 동부경찰서의 조태순(?) 정보과장이 이같은 사정을 설명하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기에 저도 "신볍보호 요청인데 민주경찰이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느냐 이제는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결국 경비소대 1개소대가 동일방직 내부로 들어가게 됐고 저는 "말려들지 않게 잘 훈련시켜 보내라"고 당부했습니다. 최종재가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 뒤 2월21일이 되어 현장에서 속보가 들어오는데 박복례 등이 똥을 뿌리고 문제가 복잡해졌는데 돌발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경찰관들이 있었으니 이총각 지부장은 "정부 비호 하에 똥을 뿌렸다"고 얘기하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도대체 누가 똥을 뿌렸느냐. 이 똥같은 놈들아"라고 펄펄 뛰기도 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습니다.

예상대로 문제가 이렇게 되자 본부의 2국은 뒤로 빠지고 경기도경과 우리(경기지부)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저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노조원 수십명이 회사 안에서인가 어디인가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지만 인천의 기관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동일방직 회사만 사태를 막느라 동분서주했지만 저는 이를 모르는 척 했습니다.

F. 그렇게 며칠이 지나며 본부 2국 경제과의 최모 담당관이 전화를 해도 받지 않자 마침내 경제과의 방 아무개 과장이 도지부로 내려와 지부장에게 "이제는 좀 수습하러 나서야 할 것 아니냐"고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이런 문제를 예상해 경기지부는 빠지기로 했던 것 아니냐. 나는 수습할 능력도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고, 결국 방과장은 상당히 기분 나빠하며 서울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뒤 지부장이 다시 저를 불러 "일이 터진 마당에 수습을 하지 않을 수야 있느냐"고 권유했습니다. 이때부터 제가 동일방직 문제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보고도 많이 받고, 전화도 많이 하고, 회의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경찰은 "기동대를 넣어서 단식농성자들을 모두 끄집어내자"고 했으나 저는 "그런 식으로 충격을 주면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들이 자해하거나 숨지는 등 돌발상황이 생길 수 있다며 말렸습니다. 이때가 숨진 최종길교수의 동생으로서 제가 처했던 기구한 상황의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G. 저는 상황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1단계로 단식농성장의 수돗물과 전기를 끊도록 지시했습니다. 주변에 경찰의 모습은 일체 보이지 않도록 하고 스스로 지쳐서 농성장을 나오게 만들려는 일종의 심리전이었습니다. 그리고 2단계로는 농성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단식에 따른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인천시립병원의 의사와 간호원들을 흰 가운 차림으로 농성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농성자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며칠만에 회사에서의 농성은 이렇게 해서 자진해산됐습니다.

H. 그 뒤 일부는 명동성당으로 가고 일부는 인천에 남는 등 곳곳에서 항의농성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서울에서 다시 방용섭 경제과장이 내려왔습니다. 그가 지부장에게 했던 말인즉 "명동성당이 계속 반정부시위 장소로 이용되니 혼을 내야겠다. 똥을 뿌린 남자종업원들을 보내 명동성당을 쑥밭으로 만들라. 국민들도 명동성당의 꼴을 보기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부장에게 "나는 동일방직 남자 종업원들을 그렇게 조직해 동원할 만큼 영향력이 없다. 그들을 조직해 똥 뿌린 사람더러 하라고 해라"면서 거부했습니다.

당시 조화순목사가 있던 화수동교회로 상당수의 조합원들이 모여들면서 세계노동기구의 조사단이 현장에 나오고 공덕귀 이우정씨 등의 항의방문이 이어지는가 하면 가톨릭이 강력하게 개입하는 등 정말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당시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난처하게 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반도상사 등이 이에 동조하면서 분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모두를 잡아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I. 결국 본부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저에게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고 물길래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싸울 때는 처우개선도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친일파의 자식이 그 회사를 하는 모양인데 그동안 감추어 놓았던 돈으로 산업체 특별학급도 만들고 상여금도 올려주도록 하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인천의 조그만 한일방직도 상여금이 400%나 되는데 전국적 규모인 동일방직이 200%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당시 서민석 동일방직 사장을 만나서도 "골치도 아프고, 방직공장도 남아도는데 이것 하나 문 닫읍시다" "종업원들에게 제대로 대우를 안해주니 결국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냐"면서 본부에 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을 말했습니다. 이 무렵만 해도 중정담당관 권한이 강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결국 동일방직은 교사 5,6명을 채용해 산업체 특별학급 6학급을 만들고, 상여금도 400%로올리고, 통근버스도 3대 구입하여 종업원 출퇴근에 사용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노조원들에게는 이제 농성을 풀고 회사로 돌아가라고 종용했습니다. 정부가 모양을 갖춰 물러나는 것이었지요. 이때 저는 농성자들에게 '복직 보장' '구속자 석방'을 약속하도록 관계기관을 통하여 통보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J. 할 수 없이 공고를 붙였습니다. '사흘 이상 무단결근이면 해고가 가능하다'는 법조문을 설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개인별로도 '모월 모일 모시까지 회사로 돌아보면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이겠다'고 통지문을 다 보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그때 개인적으로 조화순 목사라든지 인천교구의 신부님들에게 섭섭했던 게 사실입니다. 제 생각엔 그때 노조원들을 회사로 돌려보내는 것만이 오늘날까지 해고자 복직이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사태가 복잡해지는 것을 막는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농성조합원들은 회사에 복귀하라는 요청에 50여명씩 화수동교회에서 나와 만석동의 회사 정문 앞까지 떼를 지어갔다가는 다시 돌아가는 등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 무렵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박정희정권은 총칼을 갖고 있는 군사정권이다. 여공들 몇 명 힘에 무너질 정권이 아니다. 학생들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치는 것과 노동자들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치는 것은 다르다. 국민들이 두려워 학생들의 경우에는 가혹히 못 다루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얼마든지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군사정권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다간 더 큰 희생이 난다."

결국 저는 사흘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여기가 갈림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단 한 명도 복귀시일 안에 복귀한 사람이 없으므로 본부에 보고하여 저는 농성자들을 전원 해고시키도록 조치했고, 노조는 다시 집회를 열어 박복례 집행부를 구성토록 했습니다. 블랙리스트는 본부에서 작성하고 관리 집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는 지부 내의 보직이 바뀌어 동일방직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K. 그 무렵인지 기억은 분명치 않으나 인천 북구 부평 지역의 반도상사 노조도 동일방직과 비슷한 방식으로 섬유노조 본조에서 와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때 저는 "인천에서 동일방직 문제만 해도 시끄러운데 같은 인천 지역에서 또 사고를 벌리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강력히 견제하여 기존 노조를 유지토록 한 일이 있는데, 그 무렵의 전후 사정은 당시의 노조원 장현자(당시 노조 지부장, 현 대전 여민회 부회장), 조금분(당시 노조 부지부장)등이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3. 마무리 말

부디 저의 증언이 동일방직 124명 노조원들의 해고 경위 등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이상은 제가 직접 관여했거나 듣고 본 상황을 중심으로 전혀 가감없이 기술한 것입니다. 물론 노조측과 시각을 달리하는 대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나름대로 당시 노조원들에게 가능하면 피해가 덜 가게 하는 길이 무엇일지 고심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상의 증언을 통해 동일방직의 분규는 노조 내부의 조직분규라거나 노사 갈등의 성격뿐 아니라 당국의 개입에 의한 대결의 성격도 갖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생존권 수호를 넘어 노동3권과 인권을 지키고 신장시키는 일에 온 몸을 던져 헌신해 온 동일방직 해고자 124명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2001. 3. 19 최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