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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파워엘리트]그린스펀 美호황 이끈 '세계 경제대통령'

입력 | 2001-01-03 18:30:00


지난해 12월18일 아침. 부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조찬모임을 가졌다. 법원판결로 뒤늦게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뒤 처음으로 워싱턴을 방문한 날 가장 먼저 찾은 것이다. 앨 고어 부통령도 그린스펀 의장이 임기가 만료되면 5번째로 연임시킬 것이라고 약속할 정도였다.

그린스펀 의장의 별명 중 하나는 ‘경제대통령’. 미국의 금융전문 인터넷 사이트인 스마트머니닷컴이 작년말 실시한 조사에서 그는 세계금융시장을 움직이는 30대 인물 중 1위를 차지했다. 96년 포천지는 그린스펀 의장이 빌 클린턴 대통령보다 경제에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의 한마디에 세계 주가 출렁▼

그는 ‘경제대통령’ 외에도 ‘금융시장의 신’ ‘세계경제의 구원투수’ ‘세치 혀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더 갖고 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뉴욕증시를 비롯한 세계증시가 크게 출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 의장은 1987년 6월부터 14년째 FRB의장직을 맡고 있다. 그동안 미국 대통령은 4명이나 바뀌었다. 2004년 4번째 임기를 마치면 윌리엄 마틴(19년 재임)에 이어 두 번째 장수(長壽) 의장이 된다. ‘직업이 FRB의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가 폴 볼커 전의장의 후임으로 FRB의장에 취임했을 때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취임 직후인 87년 9월4일 재할인율을 0.5%포인트 인상, 한달 뒤의 블랙먼데이로 이어졌다는 비난을 받았다. 92년 7월부터 95년 2월까지 다섯차례나 금리를 인상, “인플레이션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령과 싸운다”는 악평에 시달려야 했다.

능력이 ‘의문시’되던 그에 대한 평가가 처음으로 바뀐 것은 87년 10월. 그해 10월19일 다우지수가 508포인트(22%)나 폭락하는 블랙먼데이가 발생했다. 그린스펀 의장은 그 다음날인 10월20일, 주식시장이 문을 열기 바로 1시간 전에 “FRB는 미국의 중앙은행으로서 경제 및 금융시장을 지지하기 위해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만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주식시장 및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1년이 흐른 98년 9월29일. 그린스펀 의장은 또 한번의 마술을 부렸다. 98년 8월 러시아가 경제위기에 빠졌다. 러시아 국채에 투자하고 있던 대표적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파산위기에 몰리고 미국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그린스펀 의장은 이날 금리를 5.5%에서 5.25%로 인하한 데 이어 10월25일과 11월17일에도 금리를 더 인하했다. 미국 주가는 드라마틱하게 상승세로 돌아섰으며 전세계 증시도 안정됐다. 이때부터 ‘그린스펀효과’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14년째 재임…'직업이 FRB 의장'▼

그린스펀 의장의 말 한마디에 전세계 주가가 움직이는 것은 그의 경기판단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경기가 너무 과열됐다고 판단되면 “이제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라고 지적하는 게 그의 역할이다.

그린스펀 의장은 원래 음악도였다. 우리의 귀에 익은 줄리아드가 그의 모교다. 그래서 그를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마치 악보를 읽듯 수많은 통계수치를 해석한다”고 말한다.

▼그린스펀과 한국 증시▼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통하는 앨런 그린스펀의 영향력은 국내에서도 막강하다. 그가 밤새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여의도 증권가의 귀가 쏠리고 있다.

그가 한국증시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예컨대 미국의 금리를 올릴지, 내릴지 등을 결정하는 게 그의 일이다.

그의 말 한마디는 미국 증시를 움직이고 다시 전세계 주가를 좌지우지한다. 이달 30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내릴지의 여부가 세계 증시의 최대 관심사다. 미국 경제가 하락기에 들어섰다고 판단되면 금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 경기가 다시 상승세를 탈 것으로 기대되면서 각국 증시에는 호재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선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린스펀 의장 같은 정책당국자가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든 실정이다.

이헌재(李憲宰)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한때 그린스펀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도다. 일관성 있게 기업 금융구조조정을 밀고 나감으로써 그의 말 한마디는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이 전장관은 미국의 월가를 방문할 계획을 잡았다가 국내문제로 일정을 취소함으로써 국제적 신뢰를 잃기도 했다.

hc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