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忍苦)와 기약 없는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혼자 자식을 기르며 반세기를 버텨온 남쪽의 아내는 남편이 북에 살아 있다는 소식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북쪽의 남편들이 애타게 찾는 ‘안해(아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재가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부모―자식간 또는 형제간의 애절한 만남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정형(定型)으로 자리잡은 가운데 남편을 찾는 경우는 전혀 없고 부인을 찾는 일도 매우 드문 것이 사실. 그렇기에 망부(望婦)의 한(恨)은 깊을 수밖에 없다.
▽북측 명단에 포함돼 남편을 찾은 경우〓“자전거 사 갖고 바로 온다더니….”
평생 수절하며 두 아들을 키워온 이끝남씨(72·경북 안동시)는 16일 밤 6·25 때 행방불명된 남편 이복연(李福淵·73·건설노동자)씨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한동안 말을 잊었다.
이씨가 남편과 헤어진 것은 전쟁이 터진 며칠 뒤. 서울 명동에서 신문지국을 경영하던 남편은 “잠시 고향으로 피란 가자”며 자신과 두 아들을 한강 남쪽으로 데려간 뒤 “갈 길이 머니 자전거를 구해오겠다”며 다시 한강다리를 건넜다는 것.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생계도 막막했다. 과일행상에 제과점 다방 운영 등 억척스럽게 살았다. 개가(改嫁)하라는 말도 많았지만 남편이 꼭 돌아올 것만 같아 참고 살았다. 이씨는 “남편이 다혈질이긴 해도 자상했다”며 “새 장가 들었겠지만 가능하면 북의 가족과도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기쁨을 가누지 못했다.
▽북측 명단에 없으나 남편을 찾은 경우〓“남편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유순이씨(70·서울 양천구 신월7동)는 남편 없이 아들 김영우씨(49)만 데리고 살아온 반세기가 아득하기만 하다.
남편 김중현씨(68)는 결혼 반년 뒤 “몇 달 뒤 돌아오겠다”며 임신중인 유씨를 남겨둔 채 50년 6월 의용군에 징발돼 청주 신송리 집을 떠났다.
김필화씨(69·경북 안동시)도 북한의 남편 조민기씨(65·당시 안동사범학생)가 시부모 등을 찾는다는 소식에 “이승에서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라며 연방 눈물을 훔쳤다. 조씨 역시 결혼 1년 만에 의용군에 나갔던 것.
그러나 이들 두 할머니는 “남편이 나를 찾지 않은 걸 보니 결혼 초기라 재가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라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명단에 포함됐으나 부인이 숨진 경우〓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신문재(愼文宰·50)씨는 17일 아침 서울로부터 북한의 아버지 신용대씨(81·일본 무사시노음대 졸업) 소식을 듣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백일 무렵이던 50년 7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마지막으로 만났다던 그 아버지가 반세기만에 홀연 나타난 것. 평생 남편을 그리며 눈물짓던 어머니(이숙인씨)는 이미 20여년 전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북한의 오빠 조용관씨(78)가 부인 등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여동생 옥순씨(77·전북 임실군)는 “올케가 살아 있었더라면…”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전주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용관씨가 6·25전쟁 발발 직후 행방불명됐을 때 부인 김부선씨는 간호사였다. 김씨는 힘겹게 두 살난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을 키워오다 67년 세상을 떠났고 그 뒤 자녀들은 모두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북녘의 남편 최필순(崔泌淳·77·당시 동국대생)씨도 아내 주증연씨(76)를 찾았으나 주씨는 이미 41년 전 타계했다. 딸 양옥(良玉·57)씨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어머니도 화병으로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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