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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새아침 에세이]이해인/넓게 사랑하게 하소서

입력 | 2000-01-04 08:14:00


▼마음을 위한 기도▼

숨어있기 싫어서인가

가끔은 내 마음도 집 밖으로 외출을 한다

그가 돌아오지 않아

내내 불편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괴로웠다.

…내내 밖으로 서성이다

오랜만에 제 자리로 돌아온 마음이여

고맙다.

네가 가출한 동안은

단순한 일도 손에 안잡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울면서 기다려도 대답없던 시간들

네가 돌아와 나의 삶은 다시 기쁨이 되었다

주인인 내가 너무 무관심해서 화가 났다고?

이제 나도 잘할게

다시 만난 기념으로

아침엔 녹차 한잔 저녁엔 포도주 한잔 할까?

('마음찾기'에서)

가끔 작은 모임에서 이 시를 읽으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음짓곤 했습니다. 서울엔 이미 눈도 내렸다는데 남쪽은 아직 포근한 날씨이지만 바다 때문인지 요즘은 바람이 많이 붑니다.

때로는 휘파람 소리를, 때로는 피리 소리를 내는 겨울바람 속에서 붉은 동백꽃이 환히 웃고, 새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희망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태어난 모국의 땅에서 한 세기를 마감하고 또 새로운 한세기를 맞이한 이 뜻깊은 감회를 어찌 가벼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요즘은 그야말로 새천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새천년에는 당장 어제와는 다른 환하고 즐거운 세상이 열리기라도 할 것처럼 다들 조금은 들떠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에겐 어제와는 다르게 기대할 할 일이 많다는 뜻도 되지만, 차분히 마음을 모으고 오늘에 성실해야 할 우리의 임무를 들뜬 마음이 방해할 수도 있는 듯합니다.

해맞이를 어디서 할 것이냐고,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싶으냐고 새천년이 가기 전에 저에게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해맞이는 평소와 같이 제가 머무는 수녀원에서 할 것이고요, 새해를 맞아 제가 특별히 갖고 싶은 마음은 평상심이랍니다’하고 대답하면서 문득 ‘마음을 위한 기도’를 마치고 싶어졌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기계문명의 혜택을 많이 누리는 대신 잃어버렸던 마음, 너무 편리하게 살다보니 오히려 게을러지고 그래서 자주 외롭고 쓸쓸했던 마음을 다시 찾아 정성껏 키우고 길들이며 살고 싶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실함, 어떤 모양으로든지 관계를 맺는 이들에게는 변덕스럽지 않은 진실함을 지니고 매일을 살게 해 주십시오.시련이 닥치더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견디어내는 참을성으로 한 번 밖에 없는 제 삶의 길을 끝까지 충실하게 걷게 해 주십시오.

숲속의 호수처럼 고요한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게 바삐 돌아가는 산만한 나날들에도 방해를 받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마음의 고요를 키우게 해 주십시오. 바쁜 것을 핑계로 자주 들여다보지 못해 왠지 낯설고 서먹해진 제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도록, 흩어진 마음을 안으로 모으는 깊은 고요함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고요한 기다림 속에 익어가는 고요한 예술로서의 삶을 기대해 봅니다.

마음이 소란하고 산만해질 때마다 시성 타고르가 그리 한 것처럼 저도 ‘내 마음이여, 조용히, 내 마음이여,조용히’하고 기도처럼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늘을 담은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지나친 편견과 선입견으로 남을 가차없이 속단하기보다는 폭넓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내 가족, 내 지역, 내 종교만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마음을 넓히는 시원함으로 나라를, 겨레를, 세계를 넓게 바라보고 넓게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밤새 내린 첫눈처럼 깨끗한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악과 거짓과 타협하지 않고 위선을 배격하는 정직한 마음,탐욕에 눈이 멀어 함부로 헛된 맹세를 하지 않으며, 작은 약속도 소홀히 하지 않는 진지함을 지니고 싶습니다.

감각적인 쾌락에 영혼을 팔지 않으며, 자유와 방종을 혼돈하지 않는 지혜로움, 어린이 같은 천진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용기를 지니게 해 주십시오.

사랑의 심지를 깊이 묻어둔 등불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할 수 있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마음, 다른 이의 아픔을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정 나의 것으로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연민의 마음을 지니고 싶습니다.

남에 대한 사소한 배려를 잊지 않으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따뜻한 마음, 아무리 속상해도 모진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온유한 마음, 사람과 자연과 사물에 대해 마음의 창을 닫지 않는 사랑의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평화의 산물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가을 들녘의 벼 이삭처럼 익을수록 고개숙이는 겸손한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자기도취에 빠져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 마음, 부끄러운 약점과 실수를 억지로 감추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마음, 자신의 잘못을 비겁하게 남의 탓으로 미루지 않는 겸허함을 지니고 싶습니다. 다른 이의 평판 때문에 근심하고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의연함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일은 내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하는 깨어 있음으로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며, 오늘 해야 할 용서를 내일로 미루지 않는 겸손함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살아있는 동안은 나이에 상관 없이 능금처럼 풋풋하고 설레는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사람과 자연과 사물에 대해 창을 닫지 않는 열린 마음, 삶의 경이로움에 자주 감동할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싶습니다.타성에 젖어 무디고 둔하고 메마를 삶을 적셔줄 수 있는 예리한 감정을 항상 기도로 갈고 닦게 해 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기적으로만 살지는 않겠습니다. 더 이상 분수에 어긋나는 허황된 꿈을 꾸지도 않겠습니다.

함께 살아있음의 축복을 나누며, 서로 먼저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2000년의 둥근 해를 가슴에 들여놓고 뜨거운 마음으로 길을 떠나는 순례자인 우리,희망의 닻을 올리고 겸허한 각오로 ‘마음의 길’을 새롭게 떠나려는 우리를 부디 새롭게 축복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