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달의 잠행 (31) ▼
―미친놈이 어디서 돈을 구해와 나를 빼내주었어. 알고보니 그 돈은 또 내 앞으로 빌린 거였어. 전 보다 두 배나 되는 액수였지. 이젠 내 앞으로 빚이 얼만지 가늠도 안 서. 내 이름의 카드가 세장인데, 카드 빚만 해도 600만원이야. 달마다 저기서 뽑아서 여기 메우느라 허리가 휘청거리지.
―남편은 어떻게 만났어요?
휴게소 여자는 소주를 또 홀짝 털어 넣었다. 벌써 취한 것 같았다.
―… 술집에서. 술집에서 외박을 따라나갔지……. 첫 손님이었어.
여자의 눈이 번득거렸다.
―열 일곱 살 때, 강간을 당했어. 겨우 여고 1학년 때, 여러 놈이었어. 빤한 시골 동네라…. 누가 누군지 다 알았지. 두 놈이 친구들을 몰고와서 일을 저지른 거였어. 난 그러고도 학교에 계속 다녔어. 그런데 고 3이 된 어느 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정말로 알게 되었지. 한밤중에 마을에 살던 두 놈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쳤어.
절에 가서 중이 되겠다고 하니까, 스님이 날더러 중이 될 팔자는 아니라면서 받아주지를 않았어. 오갈 데도 없이 헤매다가 그렇고 그런 술집엘 가게 되었지. 그 첫날에 이 원수를 만난 거야. 날 사람으로 안 봐. 개를 데리고 놀 듯 마음대로 헤집고 뒤집고 입이고 콧구멍이고 똥구멍이고 아무데나 처박아 넣고 멸시하고, 내가 짐승이라는 것을 잠시라도 잊지 못하게 등짝을 때리고 한 마디 대꾸라도 하면 은혜 모르는 년이라고 패지.
―떠나야 해요.
나는 누구에게 애원이라도 하듯이 간절하게 말했다.
―가버려요.
―… 갈 거야. 빚만 갚으면……. 빌어먹을, 그렇지 않으면 또 잡혀오니까. 아니면 이 원수 같은 놈 등짝에 칼을 꽂아버리든지, 새끼들만 아니면 이렇게 평생을 보낼 바에야 감방이 나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자의 눈은 여전히 건조하게 번득거리기만 했다. 이 여자는 언제 우는 것일까…….
―난 이미흔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이름?…. 고향 떠난 뒤 내 이름을 누구에게 말 한 적은 한번도 없는 걸.
여자는 내가 대단한 사치를 권하기라도 했다는 듯 어리둥절해 하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름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용경이에요. 나용경……. 부르지는 말아요. 그냥 알고만 있어요. 이래뵈도 고향에 가면 아버지도 있고 엄마도 있고 남동생도 둘이나 있어요.
용경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발설하듯 낮게 말하고 들어가서 새 소주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수 엄마는 왜 그래요?
나는 대답을 못하고 무슨 뜻이냐는 듯 자신없게 묻는 눈빛을 보냈다.
―왜 바람 피우냐고? 내 보기에 아저씨도 훌륭해 보이고 살림도 있어 보이고, 아들도 똑똑하고 모두 건강하고,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 팔자면 하느님이 무서워서라도 딴 짓 안 할 거야. 내 평생에 그렇게 살아보지는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