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딜러들
국내 굴지의 대기업중 하나가 거액 환차손(換差損)을 입었다는 루머로 이 기업의 주가가 요동치자 증권거래소는 그 기업에 공시를 요구했다.
증권거래소가 “외환 위험에 대비해서 헤지(위험회피)를 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자 이 회사 전무는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헤지가 뭐요.”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이 매출액 1천원당 2원꼴의 환차익을 보아 36원씩의 경상이익을 내던 95년의 에피소드다.
작년에 제조업체들은 제조원가와 판매관리비 이자 등 모든 비용을 제외하고 1천원어치를 팔아 평균 28원을 남기는 장사를 했다. 그렇지만 환차손 등 외환부문에서만 매출액 1천원당 31원을 까먹었다. 결국 1천원어치 물건을 팔아 평균 3원꼴의 경상적자를 내고 말았다.
지난해 외환위기를 계기로 기업경영자들의 외환위험이나 헤지에 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외환위험이 국내 기업의 존망에 영향을 줄 만큼 비중이 커진 때문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환위험에 무방비 상태다.
외환위험을 헤지할 만한 시장이 국내에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기업경영진의 인식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외환딜러나 기업 외환담당자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외환위험과 헤지에 대한 경영진의 무지를 꼬집어 “무식한 귀신한테는 굿도 안통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
요즘 원―달러 환율은 1천4백원 가량. 유럽계 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최근 한 중소기업체 사장으로부터 ‘달러당 1천4백원에 1년짜리 선물환을 사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현재 값으로 1년 뒤에 달러를 손에 넣겠다는 ‘욕심’이다. “최소한 1백80원은 더 내야 한다”고 설명하자 상대방은 “말도 안된다”는 반응을 보여 대화가 이어지질 못했다.
일정 시점에 달러 현찰을 손에 쥐고 싶은 사람은 △달러값 △원화와 달러화의 이자차이 △원―달러환율 예상변동폭을 합한 선물환값을 지불해야한다. 이런 비용을 물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중소기업체 사장뿐이 아니다.
일류 대기업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외환거래로 국내 기업중 열 손가락안에 드는 모 대기업의 외환담당자는 “환율이 오르거나 내릴 것으로 예상해서 헤지를 했다가 환율이 반대로 움직이면 모든 책임을 실무자가 뒤집어 쓴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헤지를 하지 않아 손실이 난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서 “결국 헤지를 잘하면 본전,잘못하면 역적,아예 하지 않으면 본전인 셈”이라고 푸념했다.
국내 대기업 외환부서를 거쳐 지금은 홍콩샹하이은행에서 외환딜러로 일하고 있는 송성혁(宋成赫)차장의 설명.
“외환헤지란 공장을 짓고 화재보험에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헤지한대로 환율이 안움직였다고 책임을 묻는 것은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화재보험에 들었는데 왜 불이 안나느냐’고 따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결국 국내 기업들은 엉뚱하게도 엄청난 환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외환 컨설팅업체인 핀텍의 배우규(裵禹奎)대표의 지적.
“외화로 물품이나 자본을 거래하는 기업은 환율이 변동하면 자기 의사와 관계 없이 손실 또는 이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손실이 닥칠지 모르는데도 아무런 헤지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환투기를 하는 것이지요.”
외국 기업들은 어떤지 들여다보자. 전구제조업체인 독일계 오스람코리아는 원―달러 환율이 안정적이던 96년 9월경 향후 외환거래에 대비해 일부 헤지거래를 해뒀다가 연간 약 4억원을 손해봤다. 담당자가 혼쭐이 났을까. 이 회사 경리과 최중항대리의 대답.
“불필요한 헤지거래를 했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헤지가 영업활동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지요.”
작년 9월 원―달러 환율이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자 이 회사는 1년간 필요한 달러를 선물환거래로 100% 조달해뒀다. 요즘 환율 수준이 8월까지 이어진다면 이 회사는 선물환거래로 1백50억원 정도의 환차익을 보게 된다.
이 회사뿐 아니라 적잖은 다국적기업들이 지난해 9, 10월경 100% 가까이 헤지거래를 했다고 외환딜러들은 전했다. 도이체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한국에 진출한 독일 기업들은 적정선의 영업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환율수준이라면 비용에 관계없이 과감하게 헤지거래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외환위험에 대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헤지를 하는 우둔한 기업은 없다. 헤지비율이나 전략 등은 각 기업마다 각양각색이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외환위험을 헤지하는데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외환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인 셈이다.
첫째, 제조업체는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적당한 수준의 헤지거래를 한다. 환율예측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큰 이익이나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영업이익을 지키는데 목표를 두고 외환위험의 정도를 감안해서 헤지를 한다.
둘째, 거래국 통화동향을 분석, 전망하고 외환거래를 총괄지휘하는 금융센터를 런던 등 국제금융중심지에 설치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일부 다국적기업에서는 금융센터가 ‘기업내 은행’이라고 불릴만큼 위상이 높고 많은 일을 한다.
셋째, 외환실무자에게 외환위험과 헤지거래에 관한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명확한 책임규정을 두거나 최고경영자가 적극적으로 판단을 한다.
〈천광암기자〉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