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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봉순이 언니 (36)

입력 | 1998-06-07 20:14:00


언니와 오빠가 모두 학교로 가고 마당 한구석에서 소꿉을 살고 있던 나는 어머니와 업이엄마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들었다. 업이엄마와 어머니가 벌써 봉순이 언니와 내가 쓰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열린 방문틈으로, 봉순이 언니의 낡은 가방이 파헤쳐지고, 언니가 이미자의 노래가사를 받아 쓴 노트들이 파르르 넘겨지고 언니의 속옷보따리가 헝클어지는 게 보였다.

―뭐하니? 가서 봉순이 불러오라니까!

방문 안을 멍청하게 들여다보고 있던 내게 어머니는 소리를 쳤고,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집밖으로 나왔다. 골목길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아랫집 지붕을 건너 뛰던 도둑 고양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동안 멈칫, 하더니 야웅 하고 울며 사라졌다.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 내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일이, 내가 이제까지 몸을 맡기고 있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류가 다가오는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막연하게 나를 덮쳤다.

엄마와 업이 엄마의 손끝에서 헤쳐지던 봉순이 언니의 사물들이 뭐랄까 사냥감이 되어버린 짐승의 몸뚱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피냄새를 맡은 물고기처럼 예민해져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느끼한 것을 많이 먹은 것처럼 배가 자꾸만 미식미식거렸다. 봉순이 언니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미자언니네 집으로 가서 담배를 한대 청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참, 얘가 이거 사람 잡을 애 아냐.

미자언니는 불이 붙은 담배를 내어주면서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심란한 표정으로 익숙하게 담배를 피워물고 있는 다섯살짜리 내 모습이 기가 막히기도 했으리라.

저녁무렵 내가 집으로 돌아가자, 대문 가까운 공부방에 있던 우리 언니가 연필을 입에 문 채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는 손짓을 했다.

―이리와 너, 안방 근처엔 가지 말구. 엄마가 여기 공부방에 와 있으래.

나는 대답 대신 문이 닫힌 안방문을 바라보았다.

―빨리 말하지 못해!

날카로운 업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낮게 타이르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우리 언니의 말을 무시하고 시멘트 바른 마당을 건너가 건넌방 툇마루에 앉았다.

―아니라니? 아니라면, 이 집에서 너 아니면 손 탈 사람이 누가 있다구 아니라는 거니! 안 되겠다. 너 혼 좀 단단히 나야겠구나 응? 니가 정 그렇다면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니까!… 저 그렇게 시치미를 뗄 참이면 옷 벗어라!

업이엄마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지나치게 또박거려서 금방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또박거리는 목소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벗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