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한파로 온 나라가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하느라 고통받고 있지만 이로부터 무풍지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치권이다. 위기극복을 위해 노동계가 스스로 자기 목을 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정리해고제의 도입에 합의해 주기까지 했건만 정작 정치권은 총리인준을 둘러싼 대립이 보여주듯이 여야의 역할만 바뀌었을 뿐 ‘낡은 힘겨루기’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그러하기에 오늘 다시 열리는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은 불안하기만 하다.
▼ 「힘겨루기 추태」 국민 불안 ▼
몸싸움으로 중단되고 만 지난 임시국회의 총리인준투표를 법적으로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는 사법부의 몫이다. 그러나 법을 떠나서 한나라당이 정정당당하게 비밀투표로 임해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내부단속을 할 수 없다는 내부사정 때문에 한나라당은 형식적으로만 비밀이지 사실상 공개투표와 다름없는 변칙적인 방식으로 투표에 임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사태를 야기했다. 이 점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한나라당의 책임은 크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여권도 책임이 많다. 우선 김대통령의 정치력 부족이다. 사실 이같은 사태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에서 불을 보듯 뻔하게 예상된 것이었다. 그러나 ‘준비된 대통령’답지 않게 사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 외길로 밀어붙이기만 한 셈이다. 물론 대선에서 있었던 자민련과의 약속은 김대통령의 선택을 제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스로 ‘국민의 정부’를 자임하고 나선 이상, 그리고 국민에게서 ‘국민의 정부’라는 평을 받기를 원한다면 김종필(金鍾泌)자민련명예총재는 새 정부의 얼굴인 총리, 그것도 초대총리로서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유신은 누가 뭐라 해도 한국현대정치사에서 가장 ‘반민주적 정부’였으며 김명예총재는 그 아래에서 최장수총리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과거는 과거이고 김명예총재가 선거에 의해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물론 김명예총재는 선거에 의해 국민의 검증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국민의 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노태우 정권도 김영삼 정권도 ‘국민의 정부’가 아닐 수 없다. 또 한나라당에는 그 전력을 볼 때 김명예총재를 비난할 자격이 없는 의원들이 많지만 국민은 그렇지 않다.
이제 문제해결의 열쇠는 김명예총재가 쥐고 있다. 김명예총재는 스스로 교착상태에 빠진 국정을 풀어 위기극복에 기여한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대국적인 입장에서 자신이 총리직을 고사하는 대신 자민련몫으로 총리를 추천하여 간접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니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으로 최소한 김명예총재가 유신을 비롯하여 그동안 쟁점이 되어온 자신의 과거 정치행적에 대해 공개적인 대국민사과를 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다짐을 함으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설령 백보 양보하고 과거는 과거라 하더라도 문제는 아직도 김명예총재가 유신은 정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 점에서 적지 않은 국민이 새 정부의 총리로 김명예총재가 부적합하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김대통령의 운신의 폭을 넓혀 주는 길만이 김명예총재도, 새 정권도, 나라도 사는 길이다.
▼ 자기회생 선행돼야 ▼
김대통령은 정리해고제의 도입에 대해 10명중 8명이 살기 위해 두명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따라 1백만명이상의 실업을 강요하고 있는 새 정권이 자신에 대해서도 솔선수범하여 20%의 희생을 보여 줄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자기희생이 선행되지 않는, 국민에 대한 우격다짐의 희생강요는 성공할 수 없다.
손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