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은 국제통화기금(IMF)자금지원을 한국에 대한 개방압력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끝까지 버텨보려던 한국은 1달러가 아쉬운 처지여서 결국 속수무책으로 개방공세에 KO패 당해 그간 미국과 일본이 요구해온 금융산업 및 내수시장 개방안을 대부분 수용하고 말았다. 정상적인 협상이었다면 무엇이라도 반대급부를 받고서 내줘야 할 우리의 「꿀단지」를 송두리째 내주고 만 셈이다. 꿀단지를 주고 얻은 것은 결국 갚아야 할 빚이다. [금융시장 활짝 열라] IMF가 내놓은 요구조건중 미국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주로 금융시장개방과 관련된 부분이다. 주식과 채권시장의 전면개방을 담고 있는 IMF요구조건은 몇 년 전부터 한미 금융협상의 단골 의제였다. IMF는 단기채 국공채 기업어음(CP) 등 채권시장 모두를 개방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미국 핫머니(투기성 자금)세력들의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단기채 시장의 개방은 이들의 염원이다. 금리가 비싼 우리나라에 채권시장에 미국돈이 들어와 과실을 챙겨가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 외국인 주식투자한도를 1인당 현행 7%에서 25%로, 총 26%에서 50%로 확대하라고 하는 것은 미국 다국적 기업과 금융기관의 이해와 일치한다. 예컨대 미국 크라이슬러사가 한국에 자동차 자회사를 갖고 싶으면 인허가를 받을 필요없이 돈을 주고 주식을 충분히 사들이면 된다. 주가와 원화가치가 폭락한 상황에서 한국의 자동차회사를 소유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돼버렸다. [재벌 해체하라] 재벌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폐지와 연결재무제표 작성 의무화도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양면성이 있다. 특히 이를 강력히 요구한 것이 미국이어서 미국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대목이다.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과 이에 따른 과다채무가 국가부도로 연결된 점을 감안할 때 미국측의 요구는 한국경제를 염려한 충고로도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경제논리란 피도 눈물도 없이 오직 냉혹한 이해관계만이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석은 다르다.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유럽 중남미 동남아 등으로 뻗어나가는 한국재벌의 추진력을 원천 봉쇄하려는 게 IMF의 의도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세계시장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재벌의 엄청난 생산력은 과잉공급을 낳고 이는 선진국 대기업의 수익성 악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선 한국재벌기업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다는 풀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IMF의 역할은 외환위기 해결을 위한 자금지원임에도 지금 IMF가 한국의 산업정책에까지 적극 간섭하는 점을 보면 이런 해석도 설득력을 갖는다. 더욱이 시중은행 몇개를 정리하라고 고집하는 것은 재벌 힘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국내 금융시스템으로 보아 은행의 파산은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의 연쇄도산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세계 자동차업계가 한국의 설비증설과 해외직접투자를 경계해 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유럽업계는 한국의 전자 자동차산업이 수출은 물론 현지직접투자 형태로 진출하는데 대해 상당히 경계해 왔고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 재벌이 자동차와 전자 조선 석유화학 등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음을 감안할 때 재벌의 몰락은 경쟁관계에 있는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관련업체들의 이익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수입선 다변화 폐지하라] 이 요구는 일본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간 일제 자동차와 전자제품의 수입확대를 수입선 다변화제도로 묶어 왔다. 국제관행과 맞지 않는 제도이지만 한일간 특수성으로 불가피한 조치였다. 지리적 문화적 여건을 감안할 때 수입선다변화제도가 폐지되면 국내 자동차 전자산업은 국내시장에서도 엄청난 곤경을 치르게 된다. 결국 이번 IMF자금의 한국 상륙을 계기로 한국의 은행과 재벌이 선진국 자본의 지배와 영향아래 놓이게 됨은 물론 국내시장도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맞았다. 〈임규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