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을 가진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안정된 생활을 걷어치우고 예술가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하면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6년전 바로 그런 상황에 부닥쳤던 주부 홍영희씨(44·서울방이동)는 건축가였던 남편의 뜻에 흔쾌히 공감했다. 그리고 용기있게 새 도전을 받아들였다. 『판화를 공부하겠다는 남편의 의사를 존중해 살림을 정리한 뒤 초등학생 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가 지난 봄 귀국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그냥 시간만 죽이며 흐리멍덩하게 지내면 안되겠다고 고심할 때 잡지에서 스위스 포크 아트 페인팅을 접하고 이거다 싶었죠. 생면부지의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다는 간곡한 편지를 띄웠고 왕복 4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16∼17세기경 유럽 상류층에서 시작된 포크 아트 페인팅은 목조 주택이나 주방용품 등에 조각하거나 그림을 그려 넣는 민속예술. 그 뒤 스위스 등 알프스 지역 농민들이 이를 모방해 옛 가구 등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것이 전세계로 퍼졌다. 『한마디로 낡고 퇴색한 가구나 일상 용품에 아크릴 물감과 붓으로 풍경과 사람 등 친근한 모습을 그려 넣어 「새 것」으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헌 것을 훌륭하게 탈바꿈시키는 재활용 예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밑그림이 있어 초보자도 간단한 작품은 쉽게 만들 수 있고 나무외에도 플라스틱과 깡통에 이르기까지 소재 제한이 없어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타고난 미적 감각에 피땀어린 노력을 기울인 끝에 93년 일본에서 포크아트페인팅 강사 자격을 땄다. 외국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 사회에서 자기 이름으로 두 강좌를 개설했고 베푸는 한국인상을 보여주고자 무료강좌도 열었다. 30∼70대의 주부제자들과 함께 도쿄(東京) 한복판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외국 땅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기 위해 시작한 일이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일본에서 아이가 누우면 발이 닿는 좁은 집에 살면서도 눈만 뜨면 작품에 몰두했죠. 오전 2시에 잠들어 6시에 일어나도 고된 줄 몰랐어요. 남이 시켰다면 그렇게 열심히 못했을 겁니다. 포크 아트만 아니라 인생도 함께 배운 셈이죠』 강습으로 번 돈은 일년에 한번씩 스위스로 건너가 새 기법을 익히는데 고스란히 쏟아부었다. 덕분에 「본토」의 상감기법을 터득해 나름대로 소화한 작품들이 일본의 전문지에 소개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나도 한 때 그랬지만 우리는 시간과 돈을 너무 아끼지 않는 것 같아요. 일본 주부들은 취미 생활도 슈퍼마켓에서 허드렛일로 돈을 벌어 해결하고 어느 경지에 오를 때까지 한가지를 진득하게 하는 자세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는 10월 서울 역삼동 인테리어 전문숍 유엘패밀리에서 첫 포크 아트 교실을 열어 이 장르를 국내에 소개할 계획이다. 〈고미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