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7월 김일성(金日成)사망이후 21일 공식적으로 권력승계 절차를 밟기 시작할 때까지 김정일(金正日)은 통치권 상속자로서 북한을 다스려 왔다. 이 기간중 그는 국방위원장과 인민군최고사령관이라는 군부의 최고직함만을 갖고 있었을 뿐 노동당 총비서와 국가주석이라는 당정(黨政)의 최고직은 비워 뒀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자」로 책봉돼 제왕학을 익혀 왔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만큼의 카리스마는 갖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새 지도자로서 자신의 비전을 내놓기보다는 이른바 「유훈통치」를 해 왔다. 김일성의 시신이 미라로 보존돼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을 호화롭게 건립하는 한편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를 내걸고 김일성 영생화 작업을 주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권수립일인 9일부터 김일성의 출생연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한 이른바 「주체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와 함께 자신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작업을 꾸준히 벌여 왔다. 주민들에게는 그가 통이 큰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광폭(廣幅)정치」 「인덕(仁德)정치」라는 말을 선전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에 대한 호칭도 꾸준히 격상됐다. 지난 8월엔 「현세의 하느님」이라는 신격화된 호칭이 언론매체에 등장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권력승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치역량을 발휘하는데도 역점을 뒀다. 무엇보다 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화채널을 확보하고 핵동결의 대가로 1천㎿급 경수로 2기를 얻어내기로 한 것은 북한으로선 상당한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후 심각한 식량위기에 처한 북한이 미국 등 서방세계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는 이때 열어 놓은 대미(對美)대화채널 덕분이었다. 한편 김정일은 한국에 대해선 김일성 조문금지조치를 문제삼아 실질적인 당국간 대화를 거부한 채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주민들의 내부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한국을 「외부의 적」으로 삼은 것이다. 나진 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에 대한 외자유치를 도모하는 등 조심스레 경제개방을 실험하고 있으나 그가 과연 근본적인 개방을 할 수 있을지, 또 북한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기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