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천상병은 누구에게건 막걸리 한잔 값을 얻어 사시장철 마시곤 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손에 잡히는대로 두잔 값인 2천원을 내밀었더니 즉석에서 천원을 돌려주면서 「임마. 경제를 생각해, 경제를!」하고 일갈했다던가』 어찌 「문단의 자유인」 뿐이랴. 50년대 문단의 풍속도와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체취가 훈훈하다. 전후 빈곤과 허탈의 정서가 짙게 드리워 있던 시절, 그들은 난롯불 앞에서 쓴 커피향내 맡으며 인생과 사랑과 낭만을 논했다. 옹색한 살림일망정 문사(文士)의 기개를 지키려는 자존심의 단면들은 풍요의 첨단을 달리는 지금도 정감있게 다가온다. 당시 문단 말석에서 대선배들의 진솔한 풍류를 엿본 소설가 이호철이 기억의 편린을 더듬고 여기에 술좌석 귀엣말로 전해들은 얘기까지 보태 「문단골 사람들」(프리미엄북스)을 펴냈다. 이호철. 6.25때 소년 인민군으로 동원됐다가 단신 월남, 죽을 고비를 열번은 더 넘기고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암울했던 70년대 옥고도 치르고 실천의 깃발도 내건 그의 삶은 소설처럼 극적이다. 『모든 경험은 낱낱이, 사그리 드러나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 그 바탕 위에서 문단사, 나아가서는 당시 문화의 역사가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늘 나직한 음성으로 공손하게 아랫사람을 대한 황순원. 느릿느릿한 말투로 후배의 미숙한 글을 넌지시 고쳐주던 김동리. 취중에 미당 서정주와 얼떨결에 「프렌치 키스」를 주고 받은 대목에선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자신의 습작 「오돌할멈」을 건네받은 염상섭선생이 빨간 색연필로 줄을 쳐준 것에 너무 감격해 백번도 넘게 읽었다는 그는 기력이 닿는다면 70, 80, 90년대 문단 야사도 펼쳐 보이겠다고 의욕을 보인다. 구수한 회고담은 엇비슷한 시기에 등단해 꽤나 많은 일화를 공유했던 한살아래 시인 박재삼에 이르러 막장을 장식한다. 박재삼의 18번은 「굳세어라 금순아」. 소설가 홍성유가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를 인용해야 할 대목이 있어 병치레중이던 시인 집에 염치불구 전화를 걸었다. 굳이 노래를 불러야 가사가 기억난다는 환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화통에 대고 2절까지 불렀고…. 온 식구가 기겁을 해 만류했다는 이야기. 책이 나오는 날 시인은 훌쩍 세상을 떴다. 〈박원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