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 金大中(김대중)총재는 지금까지 세번의 대권도전에서 좌절과 재기를 거듭한 「풍운의 정치인」이다. 김총재가 맨먼저 대선후보로 나선 것은 지난 71년 7대대통령 선거때였다. 김총재는 당시 金泳三(김영삼)의원 李哲承(이철승)전신민당대표와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경선에 나섰다. 김총재는 1차투표에서는 김영삼의원에게 졌지만 막판에 이전대표의 지지로 결선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됐다. 그해 4월에 치러진 본선에서 김총재는공화당 朴正熙(박정희)후보와 대결했으나졌다. 그러나 45.3%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망명과 연금생활 끝에 김총재는 16년이 지난 87년 13대 대선에 다시 도전한다. 당시 김총재는 김영삼씨와 후보단일화에 실패, 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정당 盧泰愚(노태우)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후보, 신민주공화당 金鍾泌(김종필)후보 등과 맞붙었다. 김총재는 이 선거에서 4명이 경합하면 여권표가 쪼개져 자신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4자필승론」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27.1%의 저조한 득표율로 3위를 기록, 완패했다. 그리고 5년 후인 92년 김총재는 세번째 대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김영삼후보는 90년 3당합당을 통해 여당후보로 변신해 있었다. 김총재는 3당합당과정에서 이탈한 「꼬마민주당」과 합당, 김후보와 대결을 벌였으나 호남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33.4%를 얻어 또다시 지고 말았다. 대선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평범한 한 시민」으로 돌아간 김총재는 그러나 95년 6.27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자 정계에 복귀,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네번째 대선준비를 하고 있다. 〈윤영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