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군 서해안의 황량한 인공간석지. 그 위에 우뚝 서 있는 한보철강 당진제철소로 매서운 겨울해풍이 분다. 한보의 하청업체 건설인부들은 지난 23일 부도사태 이후 무더기로 당진을 떠났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도 일거리를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28일 한보직원들은 사무실과 작업장에 나와 있었지만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습이다. 흩날리는 눈발만큼이나 불안한 기운이 공장전체를 짙게 덮고 있었다.》 ■하청업체〓한보측이 지어준 1백여개의 노무자숙소용 임시건물에는 지난 23일이후 기름이 떨어져 난방조차 끊겼다. 많은 인부들이 지난 주말 이곳을 떠났다. 진흙이 말라붙은 신발들과 옷가지만이 여기저기 보기싫게 흩어져 있다. ▼ 인부 3분의2가량 줄어 ▼ 鄭完泳(정완영·60)씨. 오래전부터 빨지못한 듯한 두툼한 잠바에 벙거지 모자를 쓴 그의 얼굴에 밤새 추위에 떤 표정이 역력하다. 『일은 안나갑니까』 『돈을 못받는데 누가 일을 해』 『그럼 왜 아직 안떠나는 거죠』 『아직 십장이 결정을 못내렸어』 차라리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투다. 정씨 같은 노무자들은 주로 당진제철소 B지구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인부들. 하루 1만4천여명까지 잠을 자던 이곳에 부도 소식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인부들이 빠져 나갔다. 정확한 인원은 아무도 모른다. 부도소식에 넋이 나간 한보직원들이 1백여개가 넘는 하청업체의 일용직 노무인력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곳에서 밥먹는 인부들의 수가 3분의 2가량 줄었어요』 단지내 노무자 식당인 미도식당의 여주인 姜慶英(강경영·36)씨의 말로 대략 그 수를 가늠해 볼 뿐이다. 『노무자들로부터 받은 식권(2천4백원)을 언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는 강씨는 『그렇다고 남아있는 이들에게 매정하게 밥을 해주지 않을 수도 없고…』라며 울상이다. 제철소 구내 중앙으로 뚫린 8차선 도로도 인적이 끊겼다. 승용차들만이 가끔 오갈 뿐이었다. 평소 이곳은 철근을 실어나르는 대형 화물트레일러들이 굉음을 울리며 달리던 곳이었다. 제철소 정문밖에는 『잠못자고 실어나른 철근운송비는 누구에게 받나』며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진을 치고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며칠째 밤샘 농성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2월과 올 1월분 두달치의 밀린 운송비를 지난 27일 밤 현물(철근)로 받는다며 이들이 철근을 빼낼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으나 28일에도 화물차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우리는 돈을 못받으니 떠날 수도 없다』는 운전기사 金鉉起(김현기·42)씨는 노무자들보다 더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김씨는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받은 기성어음도 어쩌면 종이조각이 돼 버릴지 모른다』며 불안해 했다. ▼한보철강〓당진제철소의 B지구 건설현장과 달리 A지구 공장은 그래도 가동되고 있지만 조업량은 현저히 줄었다. 고철을 쌓아놓은 야적장에는 거대한 화물차량이 느림보처럼 오갔다. 고철을 들어올리는 거대한 크레인도 가끔 작동할 뿐이다. 고철마저도 이달말까지 쓸 분량만 남아 있다. 철광석을 녹여 사용하는 포항제철소와는 달리 이곳 당진제철소에서는 고철을 녹여 쇠를 만드는데 관세를 물지 못해 인천항에 있는 고철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직원들은 무엇보다 공장가동이 중단될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이미 유공측에서는 LPG공급을 중단했다. 아직까지는 비축해 놓은 LPG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한전측이 전기공급까지 중단한다면 회사는 끝장이다. 安定濬(안정준)소장은 『전기공급이 중단돼 쇳물을 식히는 냉각수 펌프가 멈추고 공장내의 각 설비에 깔려있는 냉각수 파이프가 동파되면 수십㎞의 파이프를 교체해야 하므로 이를 재가동하려면 1년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악면 당진제철소에서 읍내쪽으로 떨어져 있는 유곡리 한보사원아파트. 독신자용 숙소다. 지난 27일밤 3교대 근무에 따라 밤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출하검사팀 金善基(김선기·30)씨는 잠을 잘 못잔다. 『지난해 11월 월급의 절반을 받고나서는 한푼도 받지 못했어요』 『그럼 어떻게 생활하죠』 『부모님께 말도 못하고 신용카드로 빚을 내 쓰고 있어요』 김씨는 한보직원이지만 부도이후의 소식은 TV뉴스를 듣고 알 뿐이다. 『공장의 그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제대로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지난 20일 새로 임명된 李龍男(이용남)사장은 아직 부임하지도 않았고 부사장인 안소장도 별말이 없다. 답답한 김씨는 정부의 보다 강력한 지원책이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한보직원인 남편을 따라 지난해 11월 당진으로 이사와 시곡리 23평짜리 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李惠英(이혜영·29)씨. 『남편이 다니는 한보가 그래도 대기업인데 설마 쓰러질까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도가 나니 당혹스럽다』며 『정부차원의 결정이 하루빨리 내려져 남편과 함께 무슨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직원 두달째 월급못받아 ▼ ▼주변상권〓당진읍내는 공장에서 차로 약 20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이곳에는 룸살롱 단란주점 노래방 다방 여관 등이 즐비하다. 하지만 한보직원들과 하청업체 노무자들을 주로 상대하는 이곳도 역시 부도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방 5개에 손님이 차고 넘치던 E룸살롱에는 손님이 없다. 룸살롱 마담 김모씨(32)는 늦은 밤인데도 여종업원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밤인데 왜 이래요』 『보다시피 썰렁하죠』 『설대목을 앞두고 한창 좋을 때 아닌가요』 『하청업체에서 한보직원들을 접대하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아 장사할 만했는데 걱정이에요』 당진읍내에서 공장에 이르는 도로주변에는 가든식 식당들도 많다. 이곳에 물수건을 공급하는 남산숯불갈비 이부열씨(40)는 『우리 식당이 안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보부도사태이후 물수건을 새로 주문하는 식당들이 없다』며 『한보와 그 하청업체 직원들이 어딜 간 건 아니지만 모두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