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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길 우리가 가야 할 길

돌아오지 못한 그들의 길 우리가 가야 할 길

Posted February. 17, 200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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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나선 3인의 대장정은 멀고먼 고난의 행로였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고 한 명은 낯선 땅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지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에 선포한 그들의 단심()은 100년이 흐른 지금도 시들지 않았다 올해는 1907년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이준 열사 등 3인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려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이 되는 해다.

뜻 깊은 해를 맞아 동아일보는 돌아오지 못한 길을 떠난 이준 열사의 궤적을 좇는 답사 프로그램 열사의 길을 따라서를 진행한다. 6월 25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베를린브뤼셀 등을 거쳐 7월 13일 헤이그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또한 헤이그 현지를 찾는 대학생 500명(선착순)에게 배낭여행 비용을 지원하는 유럽의 하늘에서 조국을 바라보자 프로그램을 위해 3월 중 참가자를 모집한다. 7월 1315일에는 헤이그 현지에서 학술 심포지엄과 한국무용 공연을 비롯한 다채로운 행사도 진행한다.

100년 전의 역사와 현재의 만남을 준비하며 본보는 헤이그 현지에서 열사들의 울분에 찬 발자취를 좇아가 봤다.

헤이그의 덴하흐 HS역. 이준, 이위종, 이상설 세 명의 열사가 한 달이 넘도록 허위허위 먼 길을 달려 도착한 역이다. 아직도 기차역으로 쓰이는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열사들의 도착일은 6월 25일. 만국평화회의가 개막한 지 10일이나 지난 뒤였다. 뒤늦게 도착해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을까.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세 열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기차역 정면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시내로 향했다. 100년 전 열사들도 이 길을 걸었다. 1km도 채 안 되는 지점에 이준 열사 기념관이 나타났다. 입구에 걸린 태극기가 반갑다. 100년 전에는 드용이라는 호텔이었던 곳. 세 열사가 묵었던 숙소다. 3층짜리 작은 건물. 호텔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했다.

지금은 2, 3층이 기념관이다. 교민 이기항(70) 송창주(67) 씨 부부가 건물을 사들여 1995년 기념관으로 다시 단장했다. 유럽 유일의 항일운동 유적지인 이 기념관에는 이 씨 부부가 모은 자료로 가득했다. 당시 열사들의 활동을 보도한 만국평화회의보, 열사들이 배포한 호소문, 스즈키 일본 특명전권대사가 본국으로 타전한 전보 등 귀중한 자료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날인 6월 26일, 열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요청했지만 초청장이 없으니 참석할 수 없다는 싸늘한 대답만 돌아왔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은 현재 상원 의사당 건물이다. 멀리서도 첨탑 2개가 눈에 띄었다. 마치 작은 교회당 같다.

기자가 갔을 때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100년 전 세 열사도 끝내 이 문을 열지 못했다. 회의장 앞 광장에서 통한의 눈물을 삼켰을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던 열사들은 회의장 밖에서 호소문을 돌렸고, 7월 8일에는 국제기자클럽에 초청받아 작은 연설회를 열 수 있었다. 운하 변에 위치한 국제기자클럽 건물은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다. 다락방까지 포함해 봐야 3층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건물은 현재 사무용 빌딩으로 쓰이고 있다.

연설회를 통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희망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비극이 발생했다.

7월 14일. 이준 열사가 숙소에서 숨을 거뒀다. 일요일인 이날은 얄궂게도 프랑스혁명 기념일이다. 기념관에서 열사의 유해 운구 소식을 보도한 만국평화회의보 7월 17일자를 보니 당시의 쓸쓸한 정황이 지금도 가슴을 저민다.

열사의 유해는 56년간 이곳에 있다가 1963년에야 한국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여전히 추모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기자가 찾은 날도 묘지 입구와 제단 꽃병에는 누군가 방금 갖다 놓은 듯 새하얀 국화가 놓여 있었다.



금동근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