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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자오쯔양의 유산

Posted January. 24, 200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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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다오. 1989년 5월 톈안먼 광장을 메운 대학생들의 구호다. 구()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방문을 앞둔 때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은 애국학생들의 애국운동 현장을 찾아 미안하다. 너무 늦게 왔다며 눈물을 흘린 죄로 실각됐다. 중국의 고르바초프라 불렸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톈안먼은 조용하다. 고인에 대한 평가 때문에 중국 당국과 유족이 맞서 장례 일정조차 못 잡는다지만 대학가 역시 평화롭다는 게 외신의 전언이다. 그때 민주화의 열기는 다 어디로 간 걸까.

16년 전 확성기를 들고 학생들 앞에 선 자오의 사진 속엔 젊은 날의 원자바오 현 총리가 찍혀 있다. 공산당 개혁 주장을 거든 보좌역으로서다. 그날로 정치생명이 끝난 자오와는 보좌의 연()도 끝났다. 2003년 총리직에 오른 그는 자오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13년간의 놀라운 성취를 돌아볼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안정이라고 답했을 뿐이다.

그 안정 덕인가. 요즘 중국 젊은이들은 정치에 관심 없다고 BBC방송 인터넷판은 소개한다. 최대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다. 그 시절의 이상주의는 너무 순진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뛰쳐나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학생도 적지 않다. 언론에 호소하겠다는 대답도 나왔다.

혁명은 억압이 극심할 때가 아니라 부푼 기대가 무참히 깨졌을 때 폭발한다. 덩샤오핑은 이를 간파했다. 톈안먼사태 진압 이후 경제개혁의 속도를 높인 것도 이 때문이다. 15, 16년 전만 해도 당에서 어디 살아라, 살지 말아라며 개인을 간섭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약간의 자유선거도 있고, 핵심을 안 건드리는 한계만 지킨다면 언론의 정부비판도 가능하다. 눈부신 경제발전은 말할 것도 없다. 자오의 눈물이 없었어도 중국의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역사를 오늘의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김 순 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