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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어선28년벚꽃흐드러진그날,내청춘의꽃은졌다 (일)

노예어선28년벚꽃흐드러진그날,내청춘의꽃은졌다 (일)

Posted April. 19, 2012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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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솔찮은(변변한) 직업도 없는 것 같은디 배 한번 타보겠는가?

1965년 전북 김제에서 소작농으로 살던 부모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를 두고 주위에서는 모자란 아이라며 수군댔다.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면서도 끼니 걱정을 해야 했던 부모는 자식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는 무작정 집을 나와 떠돌이생활을 시작했다. 공장과 식당, 공사장 등을 돌며 허드렛일을 했지만 먹고 재워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군산의 한 중국집에서 배달원을 하다가 남들처럼 돈을 벌고 싶어 다시 거리로 뛰쳐나온 그에게 배를 타보라는 제안은 솔깃하게 들렸다.

뭔 배요? 한 달에 얼매나 주간디요(주는데요)?

아따, 고기 잡는 어선이제. 내가 숙식은 제공하고, 선주한테 잘 얘기해서 30만40만 원은 받게 해줄 텐께.

배는 처음인디 까짓 거, 한번 해봅시다.

여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밥값도 받지 않았다. 그 공짜 밥은 박 씨가 28년간 겪게 될 노예생활의 입장권이었다.

꼬임에 넘어가 시작된 뱃일

여주인을 따라 들어간 곳은 식당 뒤에 붙은 허름한 여인숙이었다. 두 평 남짓한 골방에 짐을 풀게 한 여주인은 선주와 연락하는 동안 당분간 이 방에서 지내고, 밥은 식당에서 먹으면 되니 편하게 지내라며 여인숙을 나갔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갖게 됐다는 생각에 마냥 설레었다.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주인이 베푸는 온정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 날 여주인이 선주를 만나자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군산시내 한 다방에서 만난 선주는 이름 고향 가족관계를 묻더니 배를 처음 타니 한 달에 30만 원씩 주겠다. 이틀 뒤 출항 때 부둣가에서 보자고 했다. 그러고는 여주인과 귓속말을 나누고 사라졌다.

이틀 뒤 만난 선주는 선원 3명이 승선해 있는 5t 규모의 배에 타라고 했다. 소라를 주로 잡는다고 했다. 배 뒤편으로 여주인의 손을 잡아끈 선주는 만 원짜리 돈다발을 건넸다. 여주인은 그에게 배에서는 돈을 쓸 일이 없으니 내가 맡아놓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시동을 건 배는 먼 바다로 천천히 뱃머리를 돌렸다.

고된 노동에 한숨과 눈물만

출항한 지 2시간이 지난 서해 바다에는 2m가 넘는 파도가 넘실댔다. 한 번도 배를 타본 경험이 없는 그는 곧장 멀미를 시작했다. 그러자 선장은 조타실 아래 선원실에 누워 있으라고 했다. 배려는 그걸로 끝이었다.

다에 어둠이 내리자 선장은 그를 깨워 그물을 내리고 걷는 일을 시켰다. 밥과 김치, 고추장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한 뒤 5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까. 다시 조업이 시작됐다. 그물에 걸려든 각종 해산물을 분류한 뒤 그물을 손질하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부두를 떠나온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육지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손은 그물에 베어 상처투성이였다. 옷에서는 땀과 비린내가 뒤섞여 악취가 진동했다. 선장이 며칠에 한 번씩 무전기로 연락하면 수산물 운반선이 다가와 어획물을 싣고 가며 쌀과 부식을 던져줬다. 가끔 선장은 이름도 모르는 섬 근처에 정박한 채 혼자 운반선을 타고 육지에 나갔다 왔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선장에게 배를 그만 타고 싶으니 부두에 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곧장 욕설과 몽둥이가 날아왔다.

이 야, 네 몸값으로 지불한 선금이 얼만데.

두려움과 참담함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육지에 돌아와도 감금과 폭력뿐

서해안에 금어기()가 시작된 7월 부두에 어선이 돌아오자 여주인이 아들 이모 씨(당시 19세)와 폭력배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 3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선주에게 돈다발을 건네받은 그녀는 고생했다며 박 씨를 자신의 식당으로 데려가 술을 먹인 뒤 여인숙에 재웠다. 다음 날 잠에서 깬 그는 여주인을 찾아갔다.

나 뱃일 안 나갈라요. 내 월급 주쇼.

이런 미친 놈. 니가 밀린 외상이 얼만디.

차 씨는 식사비와 술값, 숙박비가 부풀려진 외상장부를 보여준 뒤 아들과 패거리를 불렀다. 식당 인근 외진 공터로 끌려간 그는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흠씬 두들겨 맞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10여 일간 앓아누웠던 그가 아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여주인은 폭력배들을 붙여 감시했다. 여주인은 며칠 뒤 다시 그를 부둣가로 데리고 나갔다. 이번에는 여섯 달 이상 군산과 목포 일대 해역을 휘젓고 다니며 고기를 닥치는 대로 잡는 저인망어선인 일명 고데구리 배였다. 선장도 달랐다. 그 뒤 1년에 10개월 이상 어선을 바꿔가며 바다를 떠돌다 돌아와 감금생활을 반복하며 그는 조금씩 희망을 놓아버렸다.

10여 년이라는 세월은 그렇게 빠르게 흘렀다. 여주인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1996년부터는 아들 이 씨가 그를 강제로 배에 태웠다. 매년 조업을 마치고 여인숙에 돌아오면 비슷한 처지의 선원들도 점점 불어났다. 40여 명까지 선원이 늘자 감시의 눈길도 더 삼엄해졌다. 이들 모두는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 주민 신고를 의식했는지 선원들의 숙소도 여인숙에서 외곽 주택으로 매년 바꿨다. 도망가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씨는 1년에 한두 번 선원들 숙소로 윤락녀를 들였다. 이 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룸살롱에서 하룻밤에 수백만 원씩 술값을 내는 것으로 유명해 인근 유흥업계에서 회장님으로 불렸다.

노예생활을 벗어나다

2월 해양경찰청에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박 씨를 포함한 선원들의 삶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해경 광역수사1계는 우선 선주들을 상대로 내사를 시작했다. 이 씨가 선원들의 임금을 현금으로 받아갔다는 진술을 받았다. 문제는 피해자인 선원들의 진술이었다. 조업철을 맞아 이 씨가 선원들을 군산이나 목포 선적 어선에 선금을 받고 넘긴 뒤라 7명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선원 대다수가 지적장애를 겪고 있는 데다 오랜 기간 사회와 격리돼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들은 조사를 담당하는 경찰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해경이 전문기관에 의뢰해 이들에 대한 심리진단을 실시한 결과 평균 사회연령이 초등학생 수준인 9.25세에 불과했다. 해경은 전문가의 도움으로 진술을 받아 이달 9일 이 씨를 약취 유인 등 혐의로 체포해 구속했다.

아직 포기할 수 없는 꿈

16일 군산의 한 여관에서 기자와 만난 박 씨는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가끔 기자를 보며 웃기도 했다. 이 여관을 운영하는 여주인 김모 씨(57)의 도움으로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휴대전화가 뭔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문자도 보낼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이날 김 씨와 함께 은행에 가서 예금 출금하는 방법도 배웠다고 자랑했다. 노동을 하면 그 대가로 당연히 임금을 받아야 하고, 이를 어기면 경찰에 신고해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며 뿌듯해했다. 구속된 이 씨가 그의 명의로 구입한 고급 승용차와 휴대전화 5대의 사용료를 내지 않아 신용불량자가 된 그는 개인파산 신청을 하기로 했다.

지난주에는 해경과 김 씨의 도움으로 30년 이상 헤어져 연락이 끊긴 친형과 80세가 다 된 노모와 통화했다. 그가 초라한 행색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만나기를 꺼려 재회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28년간 이 씨 모자에게 청춘을 빼앗기고, 육체와 영혼이 모두 일그러진 그에게도 아직 꿈은 남아 있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목돈을 모으면 조그맣게 장사를 해 볼라 혀요. 배는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지만 해산물을 다루는 데 자신이 있으니 생선을 팔아볼라고요. 돈을 벌어야 엄마랑 형제들을 만나잖아유.



황금천 kc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