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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日 쌀 수출항이었던 군산......일본인에겐 황금의 땅, 조선인에겐 눈물의 땅

對日 쌀 수출항이었던 군산......일본인에겐 황금의 땅, 조선인에겐 눈물의 땅

Posted February. 16, 2019 08:15,   

Updated February. 16, 2019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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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식 주택과 일제강점기의 근대 문화 유적들로 유명한 전북 군산은 1899년 외국인들에게 개항됐다.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황금의 땅’이었다. 땅이 비옥한 데다 땅값도 일본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군산 일대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인 뒤 쌀농사를 지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호남평야의 황금물결이여/구치(조선 쌀)는 100척이고 1000척이 실려 오사카, 도쿄까지도/어머나, 군산은 멋진 항구”라며 군산을 찬미하는 노래(군산 속요)까지 불렀다.

 군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정치적 고향이자 정한파(征韓派)의 근거지인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한국 진출에 적극적이었고, 토지 확보를 위해 탈법과 불법을 서슴지 않았다.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을 통해 수많은 한국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군산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인은 갈수록 늘어났다. 3·1만세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는 군산 거주자(1만3604명)의 절반 이상(6806명)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군산을 ‘쌀의 군산’이라 부르며 제2의 고향이라 여기고 영원히 정착하길 바랐다. 만세운동 탄압에 일본 민간인들이 적극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인 대농장이 많아질수록 한국 농민들은 몰락했다. 청년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매갈잇간(도정공장)의 매갈이공으로, 부녀자들은 쌀을 고르는 정미소 미선공으로 내몰렸다. 쌀을 배에 실어 나르는 인부나 인력거꾼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들은 언덕 비탈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집에 살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듯 살아갔다.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당시 군산 거주 한인들의 피폐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군산 주민들은 만세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정미소 노동자 파업(1924년), 옥구농민 소작 쟁의(1927년) 등의 반일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군산=안영배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