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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김범석의 오만과 한국의 자존심

Posted February. 09, 2026 08:27,   

Updated February. 09, 2026 08:27


“쿠팡은 자랑스러운 한국 기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설립돼 성장했고, 사업의 99% 이상을 한국 내에서 운영합니다.”

2019년 7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당시 한국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대대적인 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고, 그 타깃에는 쿠팡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의 소프트뱅크로부터 거액 투자를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쿠팡이 들고나온 것이 앞서 언급한 ‘쿠팡=한국 기업론’이었다.

2021년 3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할 때까지만 해도 쿠팡은 ‘한국 기업’임을 애써 강조했다.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상장 당일 언론 인터뷰에서 쿠팡의 성공을 “한강의 기적의 일부”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김 의장의 언행은 180도 달라졌다. 김 의장 지갑으로 들어가는 돈 90%가 한국 소비자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한 채, 완전한 ‘외국 기업인’ 행세다. 한국 국회의 출석 요구를 묵살하면서 그가 내세운 명분도 “글로벌 기업 CEO”라는 것이었다. 한국 소비자들에 대한 태도도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쿠팡 사태가 시작된 지 80일이 넘었지만, 3400만 피해자 앞에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고 있다. 사과인지 변명인지 헷갈리는 서면 사과문 한 장 내놓은 것이 전부다.

이런 와중에 한국을 향한 미국 정관계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J D 밴스 부통령이 김민석 국무총리에게 “쿠팡 등 ‘미국 기술 기업’들에 불이익을 주는 조치를 하지 말라”고 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이달 5일에는 미국 하원 짐 조던 법사위원장과 스콧 피츠제럴드 의원이 쿠팡에 대한 한국 정부의 ‘표적 공격’에 대해 직접 조사하겠다며 청문회 개최를 예고하고 나섰다. 조던 위원장의 정책·전략 담당 수석을 지낸 타일러 그림이 현재 쿠팡의 로비스트로 등록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배경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무엇이 김범석을 이렇게 오만하게 만든 것일까.

첫째, 한국 정치가 만들어준 ‘기울어진 운동장’ 덕에 확보한 압도적 시장지배력이다. 상장 직전인 2020년만 해도 쿠팡의 연 매출액은 대형마트 3사의 절반 수준이었다. 하지만 불과 4년 만에 쿠팡의 매출은 대형마트 3사의 전체 매출을 추월했다. 심야·휴일 영업을 규제하는 유통산업발전법에 대형마트들이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쿠팡이 사실상 ‘노 마크’로 시장을 싹쓸이 해온 결과다. 몸집이 커질 대로 커진 ‘공룡’ 쿠팡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둘째, 자국 기업에는 가혹하고 외국 기업에는 관대한 한국의 ‘자학적 규제’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산 5조 원을 넘는 기업의 오너는 공정거래법상 ‘총수’로 지정돼 다양한 규제를 받는다. 하지만 2021년 쿠팡의 자산이 5조 원을 돌파했을 때, 공정거래위원회는 김 의장이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를 들어 그를 ‘총수’로 지정하지 않았다. ‘외국인’이라는 방패 뒤에 숨으면 ‘규제 칼날’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공정위가 친절하게 알려준 셈이다.

끝으로 쿠팡이 그동안 워싱턴 정가에 뿌려놓은 돈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쿠팡은 2021년 뉴욕 증시 상장 이후 미국 정관계 로비에만 150억 원이 넘는 돈을 뿌렸다. 그 약발은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미국 정부와 정치권을 앞세운 그의 고압적 대응 방식이 바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인다. 문제는 이제부터 우리 정부의 대응이다. 관세 문제가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오버’를 하게 되면 국익에 치명적인 해(害)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김범석의 노림수대로 따라주는 것은 국가의 위신이나 자존심상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응 방안은 시대착오적이거나 자학적인 규제로 한국 기업들이 받아왔던 역차별을 일소하는 것이다. 쿠팡을 통제 불능의 ‘괴물’로 키운 대형마트 규제는 한시라도 빨리 폐지해야 한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맞지 않는 대기업 집단 규제도 원점에서 다시 손볼 때가 됐다. 최소한 우리 기업들이 ‘미국 기업’ 쿠팡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 정도는 만들어줘야 한다.

미 하원 조던 법사위원장은 쿠팡 청문회를 여는 명분으로 “한국 정부가 한국 및 중국 기업들에 이익을 주기 위해 미국 기업들에 대한 표적 공격을 지속해 왔다”는 점을 내세웠다. 한국 기업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 ‘미국 기업’ 좋은 일 해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또 듣는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기가 차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