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판용〉2025년은 중남미 정치 지형이 약 30년 만에 격변한 한해였다. 1998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서 우고 차베스가 당선되며 열어 제낀 온건좌파의 연쇄 집권 ‘핑크 타이드(pink tide·분홍 물결)’ 시대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파 정권의 연쇄 집권, 즉 ‘블루 타이드(blue tide·푸른 물결)’ 흐름은 내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2025년 중남미에서 열린 총 4건의 대선에서 좌파 후보가 모두 패배하며 중남미 20개국 중 우파(10개국)와 중도(1개국) 성향 정권이 과반을 차지해 전세를 뒤집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강력한 역공에 나선 이들은 경제난과 범죄·마약 문제 해결을 약속하며 정권을 쥐었다.
● 우파 득세 “경제·치안 고치겠다”
24일 대선 개표가 마무리된 온두라스에서 보수 성향의 나스리 아스푸라 후보가 승리하며 중남미 좌파 세력은 ‘2025년 대선 전패’ 성적표를 받들게 됐다. 내년 1월 취임하는 아스푸라 당선인은 미국과의 협력, 친(親)기업 정책을 강조하는 우파 성향 후보다. 온두라스 외에도 칠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올해 대선을 치른 중남미 국가에서 우파 혹은 중도 성향 후보가 승리했다.
중남미 좌파 퇴조 현상은 강력 범죄와 불법 이민자가 증가하고,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뛰자 민심이 등을 돌린 여파로 풀이된다. 손혜현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초빙교수는 “블루 타이드가 이념적 색채가 강했다면 블루 타이드는 치안과 먹거리 문제에 대한 정권 심판의 성격을 띤다”며 “산업화 실패와 범죄 집단의 확산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수준에 도달하자 중남미 전반의 여론이 우경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좌파 정권 하에서 심각한 치안 악화를 겪은 칠레에서는 불법 이민자 추방과 우범 지역의 군 투입을 약속한 강경보수 성향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가 승리했다. 20년간 좌파 정권이 집권했던 볼리비아도 중도 성향의 자유 시장주의자 로드리고 파스 대통령이 지난달 취임했다. 파스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이념은 식탁을 채우지 못한다”며 경제난 타파, 부패 척결, 미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강조했다. 온두라스도 올 4월 열린 대선에서 갱단 진압을 위해 군을 동원한 다니엘 노보아 대통령의 철권통치에 국민들이 손을 들어줬다.
이들 국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정간섭 논란에도 친미 세력을 적극 지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 10월 아르헨티나 중간선거를 앞두고 아르헨티나에 400억 달러의 투자와 통화스와프를 약속해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을 밀어줬다. 그 결과 밀레이 대통령의 집권 여당은 중간선거에서 대승을 거뒀다.
중남미 우파 지도자들 역시 ‘자국의 트럼프’ 이미지를 강조하며 반(反)이민 정책, 범죄 강경 대응, 친시장 기조 등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정책을 본떴다. 밀레이 대통령은 올 한해 10차례 넘게 미국에 방문해 친분을 과시했으며,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트럼프 행정부가 추방한 불법 이민자를 자국 교정시설에 수용하며 밀착했다.
● 블루 타이드, 내년엔 굳히기 들어갈 전망
중남미 블루 타이드 흐름이 2026년에는 굳히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2026년 대선을 치르는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코스타리카에서는 2 대 2 동률 승부가 예상되며 4개국 모두 정권 교체가 발생하지 않을 전망이다.
각각 내년 2, 4월 대선이 열리는 코스타리카와 페루에서는 보수 성향인 여당 소속 후보의 승리가 점쳐지는 상황이다. 우파 성향 미구엘 우리베 투르바이 상원의원이 지난 6월 유세 도중 총격을 당해 숨지며 극심한 정세 불안에도 집권 여당 소속 이반 세페다 상원의원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중국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재선이 유력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아들 플라비오 보우소나루 상원의원이 대선 도전에 나섰다. 내년 10월 대선을 앞두고 18일 블룸버그통신이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룰라 대통령은 47.9%로 2위 보우소나루 의원(21.3%)을 큰 폭으로 따돌렸다.
이지윤기자 asa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