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최근 북한과 이란을 ‘불량 국가(Rogue states)’로 지칭한 데 대해 북한이 “저질적이고 비상식적인 망언”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북한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요 인사를 콕 집어 비난 메시지를 낸 건 처음이다.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에 북-미 대화의 조건으로 이른바 대북 적대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신경전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 北, 美에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불량한 국가”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3일 대외용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에 ‘세계에서 가장 불량한 국가는 다른 나라들을 걸고들 자격이 없다’는 제목의 담화문을 공개했다. 담화문에서 북한은 루비오 장관이 지난달 30일 미국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는 중국 그리고 어느 정도 러시아를 마주하고 있고, 이란과 북한 같은 불량 국가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한 점을 문제 삼았다. ‘불량 국가’는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인권 유린과 대량살상무기 추구 등으로 국제사회의 위협이 되는 국가들을 일컬어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선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북한을 불량 국가로 규정하며 이른바 ‘레짐체인지’(정권교체)를 주장하기도 했다.
외무성 대변인은 “루비오의 저질적이며 비상식적인 망언은 새로 취임한 미 행정부의 그릇된 대조선(대북) 시각을 가감 없이 보여줄 뿐”이라며 “결코 그가 바라는 것처럼 미국의 국익을 도모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미국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의 적대적 언행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확인해준 계기가 됐다”며 “상응하게 강력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위협했다. 북한 외무성 산하 군축 및 평화연구소는 이날 주민들이 볼 수 있는 관영매체인 노동신문에 트럼프 행정부의 새 미사일방어(MD) 체계 구축을 비판하면서 “한계를 모르는 군사력 강화로 대답할 것”이라고 밝혔다.
● 北 루비오 비난하며 트럼프 언급은 쏙 빼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수장인 루비오 장관의 발언을 문제 삼아 원색적인 비난에 나선 건 향후 북-미 협상을 염두에 둔 ‘샅바싸움’ 성격이 짙다는 분석이 전문가들 사이에선 나온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대화 테이블에 앉고 싶다면 건설적 파트너로 인정한다고 전제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 2기 행정부는 1기 때 대비 외교안보 라인을 신속하게 구성했고 대북정책 윤곽도 빠르게 잡아가는 상황”이라며 “북한이 트럼프의 대북정책에 대한 탐색 기간 동안 자신들의 대화 전제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경고성 메시지를 계속 낼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만 북한은 담화에서 이날 비판 성명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외교가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핵능력 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하고 대화 재개를 언급하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만큼 북한이 수위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앞서 북한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에도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에 대해 “저질적 인간”이라는 원색적 비난을 해가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삼가는 방식으로 ‘톱다운식 담판’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군 안팎에서는 북한이 고강도 도발 수순을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미 본토를 때릴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이나 전술핵탄두를 활용한 7차 핵실험 등을 강행할 수 있다는 것. 군 관계자는 “북한이 상부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 ICBM을 쏠 수 있는 상태”라며 “한미 당국은 풍계리 핵실험장의 7차 핵실험 준비 관련 동향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