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July. 09, 2012 00:04,
내 유년기 기억의 첫 장을 꽉 채워 줬던 이 이야기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1950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박인숙 씨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네 아이들과 줄넘기를 하던 그는 어른들이 무리지어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
군대들이 줄지어 앉은 멋진 자동차가 서서히 들어오고 큰 길 량(양) 옆에는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엉거주춤 서서 흔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불안한 몸가짐을 하고 한 줄로 서있었다. 그것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든 전쟁의 시작이었음을 내 어찌 알았으랴!
그가 처음 본 국군의 인상은 공포였다. 박 씨의 할머니는 누군가의 집을 묻는 국군에게 부지깽이로 방향을 가리켰다는 이유로 총살될 뻔했다.
국방군 2명이 할머니를 밭에 세워놓고 권총을 겨누고 노발대발하지 않는가!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쳐왔다. 나는 달려가 할머니를 붙잡고 우리 할머니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애원했다. 동네 어른들이 나와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 할머니는 사경에서 구원됐다. 박 씨는 당시 할머니에게 달려가다 넘어져 생긴 상처를 볼 때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떠올리곤 했다.
평생 잊지 못할 국군도 있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 박 씨를 하나도 따갑지 않게 해 주겠다고 능청스럽게 속이고 물집을 터뜨린 뒤 성냥불로 지져 치료했다. 기절초풍하며 울었지만 효험이 있었는지 그날부터 나는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는 과자와 사탕을 주기도 했다.
나는 오빠가 마냥 좋았다. (그는)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하늘을 쳐다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도 나를 불러 노래도 배워(가르쳐) 주었다. 그 노래는 아버지와 이(북)쪽과 저(남)쪽으로 갈리어 그리울 때마다 혼자 애달피 부르곤 하던 노래였다.
군인의 두 얼굴이 공존하는 전쟁은 어른들에겐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세상이 바뀌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었다.
네 분이 모여서 무슨 논쟁을 그렇게 하시는지 위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끝날 줄 몰랐다. 엄마 이겨라, 아빠 이겨라. 엄마 이기면 내 가운데 손가락에 딱 붙어라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동생은 이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옆집 동원이 아버지가 달려와 아이구, 박 의사님, 어째 이러구들 있습네? 온 동리가 다 떠나가는데 빨리 가시기우!
논의 끝에 박 씨 가족도 피란길에 올랐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기다리는 것도 모른 채 무조건 떠밀려갔다. 박 씨는 할머니의 칭찬을 받을 욕심에 혼자 걷겠다고 떼쓰다 지쳐 아버지의 등에 업혔다. 짧았던 피란길은 어느 강 앞에서 끝났다.
작은 배에 우리 식구 절반밖에 탈 수 없었다. 나눠 타고 가면 되지 않겠냐는 말에도 아버님이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였다. 여기서 헤어질 수야 없지 않나. 모두 그 배를 타고 갔더라면 아버님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을.
강을 건너지 못한 박 씨 가족은 다시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때 마주친 피란민 행렬 속에서 누군가 달려 나와 아이구, 이게 박 의사 아닙니까?하고 알은체했다.
박 의사란 게 누군가 하면서 (국군) 헌병이 총탁(총의 개머리)으로 아버지를 밀쳤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우성치며 쫓아가려 하였으나 사람들을 헤치고 나갈 수 없었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다. 남쪽으로 가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것이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었다.
박 씨는 탈북한 뒤 2006년 8월 서울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찾았지만 이미 정신을 잃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가 찾아뵌 지 20여 일 만에 그의 아버지는 딸이 온 사실도 모른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등졌다. 이런 가슴 아픈 이별과 분단의 비극이 박 씨 가족만의 일은 아니었다.
박이 (인민군)소대장이 되었다. 가족과의 상봉에서 한 그의 행동이 높은 사상적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형님이 월남했다는 말을 들은 박이 아들을 가슴에 품어 보려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결연히 돌아서서 결별했다.
투철한 사상성을 보인 박도 월남자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자진해서 가장 척박한 심심산골로 들어갔다. 박 씨는 서울에 와서 박의 형을 찾아갔다.
동생이 북한에서 제일 못사는 곳에 지금도 생존해 있다는 말에 그는 눈물이 글썽이며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유언하시기를 내 죽은 다음에 이를 만나거든 이 돈을 주라면서 3000 불(약 340만 원)을 내놓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