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20세기 초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졌던 격동의 현장이다. 1896년 2월 고종이 비밀리에 경복궁을 떠나 덕수궁 근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이듬해 러시아공사관을 나온 고종이 새로운 거처로 삼은 곳이 덕수궁이었다. 당시에는 경운궁()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인근에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외국 공관이 몰려 있어 비상시를 대비한 결정이었다.
고종은 1897년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도 덕수궁 내 중명전이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논의한 곳도 덕수궁이었다. 헤이그 밀사사건 직후 고종은 일제의 강요로 퇴위했다. 그 뒤를 이은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고종은 덕수궁에 남았다. 덕수는 임금의 아버지인 상왕()을 뜻하는 말이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 8월 6일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덕수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 순종은 이 즈음 아버지 고종이 사는 곳의 명칭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변경한 듯 하다.
덕수궁이라는 명칭을 경운궁으로 되돌리자는 논의가 문화계 일각에서 이뤄지고 있다. 일재 잔재라는 이유에서다. 지난주 문화재청 주최로 공청회가 열렸다. 서울 도심에 위치한 덕수궁에선 1960, 70년대 초등학생들의 미술대회나 글짓기 행사가 자주 열렸고 화가들의 등용문이던 국전의 개최 장소였다. 이영훈이 작곡한 노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라는 가사처럼 중년 이상 세대들은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말에서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린다.
경운궁으로 다시 바꾸자는 측도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있겠지만 덕수궁이라는 명칭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민의 삶과 사연들이 스며들어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경운궁 돌담길로 바꿔 부르면 그 때의 정겨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름 안에 들어 있는 생활의 역사도 소중한 역사로서 유지됐으면 좋겠다.
홍 찬 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