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황장엽과 김정은

개인 우상화가 권력 우상화로 옮겨가고 그것이 다시 국민을 노예화할 뿐 아니라 통치자 스스로를 자기 환상으로 몰아넣어 머저리가 되게 만든다. 어제 87를 일기로 세상을 뜬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회고록에서 한 말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후계자 김정은은 어제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식장에서 병력 2만명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사열했다. 최악의 경제난 속에서 백성은 굶주리는 판에 후계자 등극을 축하하는 대규모 열병식에 돈을 펑펑 쏟아 붓는 머저리 짓을 황비서의 회고록이 잘 설명하고 있다.

북한이 시대착오적인 3대 세습을 안팎으로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펴는 날 공교롭게도 김일성 독재의 이념적 기반인 주체사상을 확립한 인물이 작고했다. 1997년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노동당 비서를 지내며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보좌한 중국을 거쳐 한국에 귀순하자 변절자여 갈 테면 가라면서도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김정일 정권은 그를 암살하기 위해 거듭 간첩을 내려보내며 안달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김정일은 그의 죽음으로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할지 몰라도 북한 정권에 대한 그의 진단과 예언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황씨는 생전 김정은에 대해 그깟 놈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며 3대 세습은 멸망을 재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별세하기 9일 전 본보 기자를 만났을 때는 북한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누가 후계자가 되든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라며 북한의 장래를 여전히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황씨는 탈북인단체연합회 상임대표, 탈북자동지회 고문, 국가정보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상임고문 등을 지내며 북한의 실상을 우리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애썼다. 아웅산 테러, KAL 858기 폭파사건 같은 북한의 국가범죄를 증언했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 100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던 북녘 동포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장막 속에서 이루어전 북한의 비밀을 상당 부문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황씨는 남한 국민에게도 따끔한 충고를 유언처럼 던졌다. 그는 많은 남한 국민이 천안함 사건의 실체를 믿지 않고 김정일을 두둔한다면 통일은 고사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고 경고했다. 2400만 북녘 동포를 압제에서 구해내고 남북통일을 달성하려던 꿈을 실현하는 날에야 그는 비로소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