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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국가 신용평가

Posted May. 01, 2010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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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보철강 삼미 진로의 부도에 이어 자금난에 빠진 기아자동차 사태가 장기화하자 대외신인도가 휘청거렸다. 무디스는 기아사태가 터지자 한국을 요주의 리스트에 포함시켰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기아차 법정 관리가 신청된 그해 10월 S&P는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낮춘 뒤 바로 A-로 한 단계 더 떨어뜨렸다. 한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지자 외국 자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져나갔다.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무디스 S&P 등 미국 신용평가회사의 힘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막강했다. 무디스는 1997년 말 한달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7단계나 한국의 신용등급을 낮추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벗어난 뒤에도 신용등급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 다음해 무디스의 조사단이 수 차례 한국을 찾았다. 그들은 올 때마다 정부와 재계의 고위층을 만났지만 등급 조정에는 인색했다. 외환위기 이전의 신용등급을 회복한 것은 무려 13년만인 올해 4월이었다.

외환위기 때 일각에서 신용등급 강등에 미국 월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운 사안이었다. 주로 유럽계 금융기관 쪽에서 그런 의견이 나왔다. 최근 미국 상원에서도 신용평가회사를 평가해야 한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미국 상원의 칼 레빈 조사소위원장은 신용평가회사들이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신 월가가 등급 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눈감았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같은 도적적 해이가 미국 금융위기를 초래하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금융위기가 부패한 시스템의 결과이고 신용평가회사들은 그 부패의 주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그리스 포르투갈에 이어 경제규모 유럽 4위인 스페인의 신용등급마저 낮추자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은 즉각 반발했다. 유럽의 독자적 신용평가기구를 만들자는 말도 있었다. 스트로스 칸 IMF총재도 신용평가회사들의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과 EU는 신용평가회사를 규제하는 법안을 마련 중이다. 신용평가회사들의 신용등급 평가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궁지에 빠진 국가들에게는 거의 죽음의 신처럼 위협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 박 영 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