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양쪽에 총탄과 포탄이 폭우처럼 쏟아지던 1950년 8월. 최후의 방어선을 놓고 국군과 인민군의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어느 날이었다. 국군 소대장이 온 몸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며 물 물 물을 외쳤다. 옆에 있던 병사는 그의 철모를 받아 들고 물가를 향해 S자로 뛰었다. 물을 가득 담아와 건네자 소대장은 꿀꺽꿀꺽 철모를 비우고는 바로 눈을 감았다. 이미 전우들은 모두 후퇴하고 없었다. 병사는 강둑을 필사적으로 기어 나왔다. 그 순간 꽝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난 병사의 오른손은 포탄 파편이 박힌 채 피투성이였다. 총과 철모, 탄띠, 수통, 군번줄을 벗어던지고 다시 논밭을 기었다. 다행히 후방에서 치료를 받고 팔에 삼각건을 맨 채로 평양, 압록강까지 진군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했다. 그사이 고향집에는 전사()통지서가 배달됐다. 낙동강 변에 던져 버린 군번줄의 이름과 군번이 전사의 증거였다. 그 충격에 병사의 어머니는 빙판길에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초등학생 때 들은 한 참전용사의 이야기다.
이번에 강원 홍천에서 발견된 수통의 말 없는 사연이 참 애틋하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수통에 날카로운 물체로 새긴 0167621이라는 군번을 단서로 민태식 일병의 것으로 결론 냈다. 하지만 그의 부모형제는 모두 사망하고 없다니, 누가 수통의 사연을 읽어 줄지. 55년간 사연을 지켜 온 수통도 말이 없다. 작년 11월 역시 홍천에서 발견된 수통엔 (일병)이란 한자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다행히 유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전사자 유해 발굴은 포성()이 멎은 지 47년 만인 2000년에야 시작됐다. 지금까지 1797구를 발굴해 53구의 신원을 확인하고 25구의 유가족을 찾았다. 좀 더 일찍 시작했어야 할 일이다. 여기에서도 역대 정부의 참전용사에 대한 소홀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주일 뒤엔 625전쟁 57주년이 되지만 보훈병원 병상엔 아직도 전상자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잊혀진 625의 상처가 더 아프다.
육 정 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