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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원혼앞에 사죄는 못할망정 또 생떼라니

Posted April. 22, 2006 03:14,   

생지옥 같던 수몰현장=1922년 경북 포항시 기계면에서 태어난 김 씨는 1941년 7월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조세이 탄광에 끌려갔다.

수몰사고가 발생한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반경 김 씨는 전날 오후 5시부터 이어진 16시간의 채탄작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갱구(탄광 입구) 근처에서 물비상이 났다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바다 위로 불쑥 나와 있는 환기구에서 검은 연기와 물기둥이 솟았지.

어른 허리 높이 정도에 불과한 좁은 갱도의 버팀목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바닷물이 순식간에 갱도 전체를 채웠다. 탄광 측은 인근 마을이 침수될 위험이 있다며 탄광 입구를 틀어막아 당시 갱 안에 있던 강제징용자들은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일본 측은 이 사고로 숨진 탄광 노동자는 한국인 징용자 133명을 포함해 모두 183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 씨는 늘 200명 이상이 채탄작업을 했기 때문에 희생자가 200명을 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탄광 측은 사고재발 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시신 발굴도 하지 않은 채 탄광을 폐쇄했다.

끝나지 않는 악몽=김 씨는 수몰사고가 발생한 지 사흘 만에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탄광을 탈출했다. 당시 조세이 탄광은 강제징용자들이 묵던 숙소 곳곳에 망루를 세우고 삼엄히 감시했다. 탄광 측은 탈출한 강제징용자를 잡아오는 주민들에게 쌀 한 가마니씩을 줬다. 붙잡힌 강제징용자들 중 상당수는 무자비한 폭행으로 숨을 거뒀다.

또 수많은 한국인 징용자가 채탄작업 중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과 전염병으로 숨졌다. 김 씨도 콜레라에 걸려 의식을 잃은 적이 있다. 일본인 의사는 김 씨를 화장터로 보내게 했으나 함께 징용됐던 고향 선배가 가까스로 구했다.

김 씨는 효고() 현의 한국인 집에 숨어 지내다 1945년 들켜 군대로 끌려갔으나 곧 광복을 맞이해 그해 10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강제징용 당시 폭행을 당해 오른팔을 거의 쓰지 못하는 김 씨는 625전쟁으로 청력마저 잃은 상이군경이다.

부인과 함께 힘겹게 살고 있는 김 씨는 몇 년 전부터 한글을 배워 자신이 겪은 일들을 공책에 적고 있다.

죽기 전에 뻔뻔한 일본한테 제대로 된 사과 받지 못할 것 같으니 가슴의 한을 풀려면 뭔가 남겨야지.



문병기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