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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등 44명 을사늑약 항의하다 퇴교

Posted December. 30, 2005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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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는 한 장의 빛바랜 신문기사였다. 2004년 6월 일본 도쿄도립 히비야() 고교의 비상근 강사인 다케이 하지메(42사진 왼쪽) 씨가 학교에 보관돼 온 1977년 8월 7일자 한국 신문 스크랩을 찾아냈던 것.

1905년 도쿄부립 제1중학교(현 히비야고)에 다니던 최린(), 최남선() 등 구한말 첫 황실특파유학생 44명이 을사늑약에 항의해 동맹휴학을 했다가 전원 퇴학당했다는 사실이 70여 년 만에 밝혀졌다는 내용이었다.

다케이 씨는 기사 내용을 단서로 해 당시의 학우회보와 동창회 명부를 뒤지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관련 사료들을 쫓기 시작했다. 1년 반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은 최근 황실특파유학생-대한제국으로부터의 50명이란 저서로 나왔다. 1878년 세워진 히비야고는 일본 최고의 명문 공립고등학교. 그 자신이 이 학교 출신으로 모교에서 사회과목과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유학생들이 일본에 온 시기는 한일 간 여러 문제의 원점이 되는 때입니다. 자료가 하나하나 샘물 솟아나듯 모였습니다. 마치 100년 전 사람들의 혼령이 인도해 주는 것 같았죠.

그 중에서도 히비야고의 학우회잡지, 일본 외무성의 외교문서, 조용은(독립운동가 조소앙의 본명)의 일기인 동유약초()는 서로 내용을 보완하며 100년 전 유학생들의 행적을 복원해 주었다. 1904년 조선정부가 선발해 보낸 국비유학생 50명은 1625세의 청년들로 이중 44명이 히비야고에 입학했다. 이들에 대한 전원퇴학조치는 외교문제로 비화됐고, 이듬해 25명이 복학했다. 그러나 최린은 동맹휴학 중심인물로 지목돼 퇴학 처리됐다. 최남선은 자퇴했고 조용은만이 제대로 졸업했다.

다케이 씨는 사료들에 나타난 입장의 차이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선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더라는 것.

가쓰우라 교장의 경우 나름대로 유학생 교육을 위해 애썼겠지만 유학생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속박하고 규제하는 인물일 뿐이었죠. 거꾸로 학생들은 조국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려 했겠지만, 가쓰우라 교장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고 일본과 조선이 놓인 여건과 문화 차이가 크게 작용한 거죠.



서영아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