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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위장결혼식

Posted October. 08, 200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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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엽 군과 윤정민 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신랑은 요즘 말로 꽃미남이었다. 얼굴이 희고 고운 연세대 사학과 재학생. 하객은 300석 남짓한 강당도 모자라 복도까지 메우고 있었다. 신랑 입장에 이어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이 낭독됐다. 18년 장기독재에 결연히 저항해 온 민주회복 투쟁이 그 최종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역사적 시점에 서서 오늘 우리는.

YWCA 위장결혼식은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 처음으로 재야인사와 학생들이 모인 시국사건이었다. 당시 계엄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집회를 열 방법은 결혼식밖에 없었다. 홍 씨가 신랑 역할을 자청했다. 정민 양은 민주화 인사들이 간절히 바랐던 민정()을 뒤집어 붙인 가상의 신부였다. 현장에서 연행돼 옥고를 치렀던 그가 독신으로 지내다 5일 세상을 떠났다. 53세, 아직은 젊은 나이. 여동생은 오빠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고인()과 함께 감옥생활을 한 이가 지금 국무총리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불렀던 이들 상당수가 참여정부에 참여할 만큼 세상은 바뀌었다. 그러나 고인이 떠난 다음날 이정복 서울대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현재의 정치과정은 군사독재시대와도 어느 면에서는 유사하다고 했다.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고 나니 과거의 타도대상이었던 군사독재정권을 닮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때 그 민주화 운동은 무엇을 위한 운동이었단 말인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1인 1표를 찍는 참여민주주의만 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으로 믿는다면 오산이다. 하물며 군사독재정권과 유사하다는 민주화, 굶어죽고 탈출하다 죽고 고문당해 죽는 북한 인권에 대해 말 한 마디 못하는 참여정부라면 심각한 문제다. 북한처럼 되자는 위장 민주화운동은 아니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 순 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