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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당신은 행복했나요?

Posted July. 22, 2005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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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말조차 건네지 못하고 사별()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 앞에 벽안()의 여인이 눈물짓고 있다. 몰락하는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의 왕자를 사랑했기에 그의 비극조차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했던 여인은 이제 팔순의 할머니가 되어 먼저 간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 (나와 헤어진) 그동안 행복했나요? 안 행복했나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의 전 부인 줄리아 멀록 여사. 그녀는 남편을 만나 그렇게 물어보는 게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한다.

행복은 조금은 위로받은 불행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그녀의 생()은 위로조차 받지 못한 불행이었다. 미국 뉴욕의 한 건축사무실에서 만난 여덟 살 연하의 동양 남자는 그녀에게 빛이고 어둠이었다. 그녀는 사랑의 빛으로 길게 드리워진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먼 이국땅 쇠락한 궁전의 모퉁이에서 시집 식구를 모시고 살았을 터이다. 그러나 어둠은 끝내 빛을 삼키고 그녀는 버려진 이방인이었다.

1958년 미국에서 결혼하고 1963년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뒤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해 온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이 낳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되는 나라에서, 그것도 황손의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큰 죄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국인인 그녀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종친()들은 이혼을 종용했고 결국 1982년 헤어졌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주지 않는 황세손비는 그렇게 홀로 남아 궁핍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서울의 한 외국인 임대주택에서 10년 넘게 바느질과 영어교습을 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995년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그녀는 미국 하와이의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2000년 가을 잠깐 서울을 찾았던 그녀는 5년 뒤 남편과 자신의 얘기를 다룰 영화 관계로 다시 서울에 왔다가 남편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묻는다. 못내 그리웠던 당신, 당신은 행복했나요?

전 진 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