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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17조 원

Posted January. 17, 2005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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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가도 현찰 1억 원도 구경하기 힘든 서민에게는 1조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실감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물리적인 크기를 상상해 보는 방법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100억 원을 1만 원짜리 새 지폐로 쌓아올렸을 때 높이는 약 110m에 이른다. 남산 만 한 높이를 쌓아올리려면 1만 원권으로 약 237억 원이 필요하다. 1조 원의 높이는 에베레스트 산에 한라산과 남산을 합한 것과 맞먹는다.

지난해 해외여행과 유학, 의료서비스 등으로 해외로 흘러나간 돈이 17조 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1만 원권 기준으로 해외여행에 남산 174개, 유학 및 연수에 남산 309개, 의료 법무 광고 등 사업서비스에 남산 220개 높이 만 한 돈이 지출된 셈이다. 물론 이 돈이 모두 낭비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중 상당액은 인적자원의 질을 높이고 국내산업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까닭은 이 돈이 국내에서 쓰였다면 우리 경제가 지금처럼 심한 불황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7조 원이 국내에서 돌았다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8%포인트 높아졌을 것이라고 한다. 일자리로 따지면 실업자 9만 명 이상을 구제할 수 있는 액수다. 경제를 살리려면 지금이라도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대신 국내에서 돌게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정부가 설에는 제발 국내에서 돈을 써 달라고 국민에게 통사정하는 것도 일부 효과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역할 수 있는 국제화시대, 명색이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나라에서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단계적 개방을 통해 교육 의료 법률 관광 레저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부자들이 국내에서 돈을 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만이 근본 해법이다. 시장보호는 해외시장과 국내시장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소비자 스스로 더 좋은 서비스를 찾아 국경을 넘나드는 경제 환경에서 보호주의 빗장은 무용지물()이다.

천 광 암 논설위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