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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희망을 복원하자

Posted December. 31, 200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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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새해가 밝았다. 광복 60주년이기도 해서 여느 때와는 다른 감회에 젖어 볼 수도 있으련만 마음은 무겁다. 지난 한 해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갈등을 한꺼번에 다 겪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목과 분열을 거듭했다. 그 상처와 불협화음을 딛고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갈등은 발전을 위한 진통이라고 하지만 이처럼 갈리고 찢긴 상황에서 쉽게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굴곡은 있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전후()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뤄 낸 나라는 우리가 거의 유일하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빈곤과 독재를 걷어 냈다. 그 저력을 다시 살려 내야 한다. 굶주림이나 면하자고 허리띠를 졸라맸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를 박차고 나가 우리도 한번쯤 아시아와 세계의 주역이 되어 보자는 염원() 때문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우리의 이념적 좌표임을 재확인하는 일이 시급하다. 보수건, 진보건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경쟁하더라도 그 토대 위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 이념 논쟁이 소모적인 색깔 논쟁이나 적대적인 보혁() 대결로 변질되지 않는다. 공유된 이념의 기반이 확고하다면 정체성() 논란이 끼어들 틈은 없다. 노무현 정권 2년의 분열과 난맥상은 그 기반이 흔들린 데 있었다.

1948년 체제도 인정해야 한다. 분단은 불행한 일이지만 1948년 510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분단은 물론 극복돼야 한다. 분단된 채로는 미완()의 광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단은 평화적, 단계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민적 합의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서도 1948년 체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형태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미() 동맹을 외교의 중심에 둬야 한다. 섣부른 반미, 자주의 부작용을 지난 2년간 절감했다. 중국의 패권 추구와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 속에서 한미 동맹을 활용할 줄 아는 안목과 지혜가 절실하다. 북한 핵문제 해결도, 개성공단의 활성화도 미국과의 공조() 없이는 불가능한 현실이다. 6자 회담의 틀 속에서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고, 장차 예상되는 동북아의 세력 구조 재편 과정에서 한반도 안전과 평화를 담보할 다자안보체제로 그 틀을 전환해야 한다. 을사늑약() 100주년, 경술국치() 95주년이다. 다시 열강()의 제물이 될 수는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이념적, 외교안보적 기초 위에서 나라를, 국민을 하나로 묶어 내야 한다. 대통령은 어느 한쪽, 한편의 대통령이 아니다. 지난해 415총선에서 여당에 과반 의석을 안겨 줌으로써 탄핵에 빠진 대통령을 구해 낸 것도 특정 지지 세력이 아니다. 다수 국민이 구한 것이다. 그런데도 왜 모두의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가. 이제는 가치의 중심, 사회의 중심에 서야 한다.

당정() 분리 원칙에 따라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생각도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17대 국회 첫 1년이 보여 주었듯이 여야가 극한 대치로 치달을 때에는 선의()의 중재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잘 돌아가 국민이 정치를 잊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궁극적 책임도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다.

임기가 3년 남았다고 하나 일할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4월 재보선은 내년 6월 지방선거로 이어지고, 지방선거는 2007년 대선의 전초전 양상을 띨 것이다. 전국 단위의 선거가 없는 해는 올해뿐이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분열만 부추기고 실익()은 없는, 과도하게 이념화된 개혁 과제들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지도자와 집권세력의 도덕적 자기만족을 위해 다수 국민이 개혁 피로에 시달려야 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노무현 정부가 뒤늦게나마 경제민생 우선을 들고 나온 것은 다행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경제는 구호나 열정만 가지고는 살릴 수 없다. 경제를 움직이는 원리로서 자유시장경제, 환경으로서 글로벌화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시장경제라고 해서 정부가 매사에 팔짱끼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빈곤층을 구제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는 국가의 역할은 강화돼야 한다. 경기 진폭을 완화하기 위한 재정금융정책도 계속돼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은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있지도 않은 시장의 실패를 내세우고 명백한 사적() 재화에까지 공공재()의 옷을 입혀 규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규제를 풀어 민간경제가 활성화되고 일자리가 늘어나면 정부가 하는 것보다 10배 이상의 복지가 구현될 수 있다.

글로벌 경제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경영진과 노조, 부자와 빈자, 수도권과 지방 등 국내적인 이분법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정서에 의존해 기업과 부자를 옥죄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항평준화식 균형발전 논리에 사로잡혀 수도권을 압박하면 서울마저 상하이나 싱가포르와의 경쟁에서 뒤질 것이다. 경제의 양극화를 발전적으로 극복하려면 경제에서도 편 가르기 식 사고를 버려야 한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도 달라져야 한다. 경제와 민생에서부터 구체적 대안()을 내놓고 경쟁해야 한다. 집권 측의 실책에서 반사이익을 취하거나 정략적 발목잡기의 행태를 더는 보여선 안 된다. 시대착오적인 매카시즘에 의존해서도 안 된다.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이 믿고 기대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올해는 동아일보 창간 8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정론()과 직필()로 권력을 감시하고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이념 세대 계층 지역 정파에 따른 분열과 갈등을 완화하고 치유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본보는 이미 뉴 라이트(New Right) 운동을 통해 극좌 극우 간의 자기파멸적 이념 대결을 지양하고 합리적 보수의 길로 나아가자고 제창한 바 있다. 새해에는 다시 하나가 되자. 함께 희망을 복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