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오피니언] 삭발

Posted July. 17, 2003 21:46,   

ENGLISH

삭발()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먼 옛날 유럽에서는 죄인을 처벌할 때 삭발을 시켰다고 한다. 머리가 다 자랄 때까지 지은 죄를 뉘우치라는 참회의 기회를 준 것이다. 불가에서 삭발은 부처에게 귀의하는 문을 두드리는 절차다. 무수한 머리카락처럼 마음을 흔드는 일체의 번뇌를 깨끗이 밀어버린다는 상징적인 행위다.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주인공 강수연이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삭발식을 갖는 장면은 속세와 연()을 끊는 아픔을 엿보게 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결연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삭발을 하기도 한다. 큰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나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이 머리를 깎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집단 항의의 표시로 삭발을 하는 사례가 두드러진다. 올 들어 유독 그런 일이 많았다. 지난달 조흥은행 파업 때는 5000명에 가까운 노조원들이 삭발을 해 단일 사안으로 사상 최대의 인원이 참여하는 삭발 신기록을 수립했다고 한다. 5월에는 어느 사립대 교수 21명이 재단의 횡포에 항의한다며 매일 한 명씩 릴레이 삭발을 했다. 몇몇 영화인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관련해 명동성당에 모여 삭발식을 진행하며 반전의 목소리를 높였다.

현직 도지사가 삭발을 하는 초유의 일도 있었다. 강현욱 전북도지사가 도민들과 함께 집단 상경해 환경단체의 새만금사업 중단 요구에 정부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서울 한복판에서 머리를 자른 것이다. 함께 온 도민 30명도 동참했다. 서울행정법원의 새만금 사업 잠정중단 결정에 항의해 그제 사표를 낸 김영진 농림부 장관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쌀 개방에 반대해 삭발투쟁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삭발은 김 장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이번에는 회사의 경영진까지 삭발을 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LG화학의 공장장들이 노조의 파업에 삭발로 맞선 것이다. 창원공장의 한 중소기업 사장은 노조가 설립되자 다음날 삭발을 한 채 출근하기도 했다. 노조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삭발을 경영진까지 하고 나선 모습에서 오죽했으면 사용자까지 삭발을 하겠느냐는 얘기가 들린다. 하지만 삭발이 횡행하는 시대는 불안하다. 삭발은 대화와 타협이 아닌 전투를 연상시키고 그만큼 세상을 각박하고 삭막하게 만든다. 나름대로 모두들 삭발을 해야만 하는 명분이나 절박한 사정이 있겠지만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삭발시위의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삭발의 시대는 언제나 끝날 수 있을까.

송 영 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