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 재산명시 심리재판이 28일 서울지법 서부지원에서 민사26단독 신우진() 판사 심리로 열렸다.
이날 재판은 우리 사회 최고 원로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전직 대통령의 도덕성과 양심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난 재판이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화제를 낳고 있다.
검찰은 1997년 4월 전씨에게 추징금 2204억원을 확정했으나 314억원만을 추징하는데 그치자 올 2월 전씨에게 재산목록 제출을 명령해 달라며 법원에 재산명시신청을 냈다.
전씨는 이날 오전 11시24분경 이양우() 변호사와 함께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법정에 들어섰다.
국방색 정장과 황색 넥타이를 매고 온 전씨는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 수십명에게 둘러싸여 포토세례를 받았으며, 기자들의 질문에 특별한 언급없이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이날 재판은 처음부터 전씨가 제출한 재산 목록이 가장 큰 쟁점이 됐고 이를 두고 판사와 전씨측이 한바탕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신 판사는 전씨측이 제출한 재산목록 서류를 보면서 전씨의 재산목록에는 본인 명의의 현금이 하나도 없고 예금과 채권을 합쳐 29만1000원이라고 돼 있는데 골프나 해외여행 등은 어떻게 다니느냐고 추궁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어투에는 납득이 안 된다는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이에 전씨는 골프협회에서 전직 대통령에게는 그린피를 무료로 해 주고 있다며 내 나이가 72세다. 그동안 인연 있는 사람을 비롯해 측근, 자녀들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며 자리에서 꼿꼿이 선 채로 비교적 또박또박 답했다. 전씨 특유의 당당한 목소리였다.
신 판사=주변인들이 추징금 낼 돈은 주지 않았습니까.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힐난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전씨=겨우 생활할 정도라 추징금을 낼 돈이 없었습니다. 정치자금으로 받은 돈을 포괄적 뇌물죄로 적용해 (추징금을 매겨) 억울합니다. 전혀 주저함이 없는 목소리.
신 판사=추징금 집행에 협조한 것은 (추징금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까. 일반인의 경우 자신이 직접 돈을 벌거나 빌려서라도 내는 게 추징금입니다. 이때 전씨는 침묵을 지켰으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씨측 이양우 변호사가 재판 진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채무자는 진솔하게 재산목록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이냐며 이번 재판은 재산목록을 심리하는 자리이지 채무변제와 연관된 주변 사실에 대해 묻는 자리가 아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신 판사는 검찰이 추정한 재산이 2157억원으로 이중 이미 전씨가 사용한 비용을 빼도 1600억원가량이 남는데 이 돈을 다 썼는가라고 물었고 전씨는 검찰에 확인해 봐라. 다 썼다고 반박했다. 판사의 추궁과 전씨의 답변이 이어지는 동안 법정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신 판사는 전씨는 이전에도 가차명계좌를 사용하다 적발된 적이 있고 검찰수사에서도 많은 무기명 채권이 발견됐다며 추징금 집행이 15%밖에 이뤄지지 않았고 1600억원의 사용처를 밝혀야 하는 등 명의신탁한 재산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신 판사는 이날 심리를 마치면서 재산은닉의 위험성과 개연성이 높다며 유가증권과 부동산 등 제3자에게 명의신탁한 재산목록과 명의신탁 시기를 비롯해 배우자와 직계가족, 형제자매 등 친인척에 대한 재산목록을 다음달 26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방청인은 20여명에 불과했다. 방청인들의 표정은 재판이 끝난 뒤에도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