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산세가 용을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고도 하고 한강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난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용산은 북으로는 남산이, 남으로는 한강이 흘러 풍수지리학상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조선시대에는 마포와 함께 정부의 세곡()과 양반층의 소작미를 실어 나르던 경강() 상인의 본거지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틈타 한국에 군대를 파병한 일본은 1년 동안 측량 활동을 벌여 마포 양화진(합정동) 용산 세 곳 중에서 용산을 개시장()으로 점찍었다.
양화진은 한적한 촌락이기 때문에 무역항으로 번성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고 마포는 인가가 들어차 빈터를 찾기가 어려웠다던가. 용산은 남대문으로부터 10리 정도의 거리로 도로가 넓고 평평해 차와 수레의 왕래가 자유스러웠다. 대부분이 밭이라 개발할 여지가 많았고 한강의 수심이 깊어 큰 선박이 입항할 수 있었다. 일본의 주동으로 1884년 용산나루터(원효대교 북단)에서 마포나루터까지의 지역이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으로 지정됐고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 중국 일본인들이 종교 및 상업 활동을 전개했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3세기 무렵이다. 고려 말 한반도를 침입한 몽고군은 용산을 병참기지로 활용했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원효로와 청파동 일대에 진을 쳤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병력 3000명이 주둔했고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이 300여만평을 강제 수용해 병영을 지었다. 광복 후 미 7사단 병력 1만5000명이 일본군의 병영을 접수해 지금의 주한미군사령부로 발전했다. 일본군부터만 따지더라도 용산에 외국군이 주둔한 지 꼬박 100년을 맞는다. 용산 일대를 아우르는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본래 한자 표기가 으로 태가 다른 곳이라는 의미를 지녀 지명 속에도 기지촌의 역사가 남아 있다.
일본군이 병영을 닦을 때만 하더라도 밭이 널려 있던 용산은 서울의 확장과 함께 강북과 강남을 잇는 도심의 한복판이 됐다.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에 외국군 기지가 자리잡고 있다 보니 나라 체면이 깎이고 도시 발전에 지장을 주면서 한미 양국 사이에 미군기지 이전 논의가 시작됐다. 사업비가 많이 들고 시일이 족히 10년은 걸리는 사업이다. 수도가 충청권으로 옮겨간다면 수도 안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명분은 다소간 빛을 잃을 텐데 형편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황 호 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황호택기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