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 때마다 으레 그렇듯 재벌개혁이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출자총액 제한, 그룹구조조정본부 해체, 금융사 계열 분리, 집단소송제 강행 등 서슬이 시퍼런 말들이 오고 간다. 언론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들이 흘리는 말들을 통해 새 정부의 재벌정책을 유추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고, 마침내 전경련은 회장단 회의를 앞당겨 열기로 했다. 재벌기업들의 불편한 심기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재벌과 대기업은 분명히 다르다고 못박고 있다. 대기업이 자력으로 커나가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특정 가문이 경영권을 세습하면서 거대 기업집단을 거느리는 것은 개혁 대상이라는 뜻이다. 재벌 총수가 직접 보유한 지분은 2%에도 못 미치는데, 계열사간 상호출자를 통해 막대한 경영권을 휘두르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니 국가경영을 맡는 입장에서 어찌 총수 개인이 부담하는 위험의 정도와 그가 장악한 권력의 크기간에 존재하는 불균형을 깨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흔히 현대기업의 이념형이라면 1932년 아돌프 벌과 가디너 민즈가 역저인 현대기업과 사유재산에서 제시한 대로 주식 소유가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소유권이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전문 경영자에 의해 자율적으로 굴러가는 전문 대기업을 연상하게 된다. 이런 현대적 기업상은 지난 수십년간 선진 각국에서 경영자 혁명을 이끌었고, 노 당선자를 둘러싼 재벌개혁론자들도 이를 우리 기업의 바람직한 장래상으로 그리고 있는 듯하다. 재벌을 두둔하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문제는 선진국에서조차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 대기업이 그다지 폭넓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국 하버드대의 라 포르타 교수팀이 세계의 선진 27개국 상위 20대 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조사 연구한 결과(1999)에 따르면 소유권이 광범위하게 분산된 기업은 전체 샘플의 3분의 1을 약간 상회할 뿐이고, 가족이나 국가가 지배권을 장악한 형태가 여전히 대종을 이룬다고 한다. 한 예로 스웨덴의 경우 상장기업의 62%가 놀랍게도 가족 소유 기업들이고,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은 의결권의 차등화, 피라미드형 소유구조를 이용해 증시 시가총액의 40%에 달하는 14개의 유력한 상장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도 스톡홀름 증시에서는 외국인 투자가 활발하다니 도대체 소위 전근대적 기업과 시장이 공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찬 근 객원논설위원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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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호논설위원 munmh9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