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보통신부 모 부서 사무실. 30명 정도 근무하는 사무실이지만 외근부서도 아닌데 반정도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남아 있던 직원들도 서너명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때 장관님 순시가 있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무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누군가 자리에 없는 직원들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일부 직원은 전화기를 붙잡고 연방 번호를 눌러댔고 일부는 사무실 밖에 있던 직원들을 불러들였다.
10여분 뒤 장관이 도착했지만 여전히 3분의 1 정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한 직원은 몇 년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6개월 뒤면 물러날 장관인데 뭘 어떠냐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김대중() 정권이 말기에 이르면서 공직사회의 기강이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다.
정권 출범 초기 강력한 사정을 추진하며 공직사회 기강 확립에 신경을 쓴 노력이 무색해지고 있다.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이 심해지면서 기강 해이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낮잠 깨우지 마세요8일 오후 2시경 정부과천청사의 기획예산처 한 사무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10여개 자리의 3분의 2 이상이 비어 있었다. 직원들이 점심식사차 나갔다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왔다가 낮잠을 자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빈 사무실에는 예산을 협의하기 위해 방문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과 국책연구소 연구원, 공기업 직원들이 담당 공무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1시간, 길게는 2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일을 볼 수 있었다.
한 지방공무원은 담당 공무원이 낮잠을 자고 있는 걸 알았지만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을까 봐 깨우지도 못하고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공무원은 예산을 쥐고 있는 기획예산처 직원들이 공무원 사회에서 군림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요즘 그 정도가 지나친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새 사업은 나중에정권 말기가 되면 빠지지 않고 논의되는 조직 개편에 대비해 해당 부처 직원들은 긴장하고 있다. 새로운 사업은 아예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고 현안 사업은 겨우 명목만 유지하고 있다.
정보통신부와 산업자원부 등 통합 논의가 있었던 부처의 직원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부처가 살아 남아야 한다는 명분을 외부에 알리는 데 주력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무에 대한 직원들의 열의도 식기 마련. 건설교통부의 한 직원은 솔직히 새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기존 사업을 질질 끌고 있는 형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원인과 대책최낙정() 해양수산부 기획관리실장은 공직사회의 기강 해이는 공무원들이 국민보다는 권력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며 공무원은 사기와 자긍심을 먹고사는 조직이니 만큼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법대 학장은 공무원들의 직무 유기에 대한 내부 고발제도와 국민감시 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며 특히 대선을 앞두고 직무유기 현상이 발생했을 때에는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엄히 다스리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